[술술 풀리는 학술] 조선시대 출판문화와 소설의 흥성
[술술 풀리는 학술] 조선시대 출판문화와 소설의 흥성
  • 최진형 덕성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9.0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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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영화 <음란서생 (2006)>
  사대부 집안의 자제이자 최고의 문장가인 윤서는 우연히 저잣거리에서 음란한 책을 접하며 큰 충격에 휩싸인다. 충격과 흥분을 잊지 못한 윤서는급기야 자신의 문장력을 발휘해 음란소설을 써보기로 한다. 곧 윤서의 음란소설은 여인네들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장안 최고의 음란작품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영화를 보면 필사쟁이들의 필사를 통해 윤서의 작품이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옛날 조선시대에서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떠한 방식으로 유통됐을까?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루카치 <소설의이론> 서문.
굳이 루카치의 언급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은 형이상학적 총체성을 찾으려 애쓰는 고독한 문제적 개인의 영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근대적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가장 인기 있던 장르가 소설이었다는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숱한 모순을 드러내는 봉건적 시대의 말기적 징후를 담아내는 데 소설만큼 적합한 장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소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라는 문자체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 가장 결정적 요인이지만 필사와 출판이라는 유통과 향유의 수단이 뒷받침됐던 것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지배층이 문화적 수단을 독점하는사회에서 구비문학이 아닌 기록문학이 이처럼 폭넓은 유통의 양상을 보인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후기에 소설 장르가 폭발적 인기를 보였던 현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 소설의 인기와 함께
  독특한 필사문화도 꽃 피어
  국문소설(한글소설)의 흥성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우선 ‘필사(筆寫)’와 ‘출판(出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고소설이 전승, 유통됐던 일차적 방식은 필사이다. 필사는 일회적 독서나 단순 향유가 아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향유방식이다. 왜냐하면 작품의 향유가 ‘읽기’나 ‘듣기’(남이 읽어주는 것)에 그치거나, 마음에 드는 작품을 소장(所藏)하기 위해 단순히 ‘베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독서 체험이나 향유 경험을 발휘해 작품의 내용을 ‘개작’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필사’는 다양하고도 입체적인 향유의 방식이었는데, 그 바탕에는 소설 작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전제돼 있었다. 현전하는 필사본을 살펴보면 그 다양한 향유의 실상을 만날 수 있다. 어린 소녀의 글씨 연습으로 보이는 필사본에서부터 종이를 아끼기 위해 이면을 이용해 빽빽하게 적어내려 갔다거나, 수없이 읽으며 오탈자를 교정하고 훼손된 곳에는 새 종이를 덧대어 정성껏 손질한 필사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필사문화’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다양한 모습들이 펼쳐진다. 이에 소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당대 소설 독자 사이에서 독특한 형태의 필사문화를 생성해내기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게 된다.

  <음란서생>의 음란소설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했던 세책본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세책필사본’이라는 독특한 방식의 필사본이 등장한다. ‘세책(貰冊)’이란 말 그대로 세를 내고 책을 빌리는 것으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도서대여점에서 유료로 책을 빌려보는 방식과 같다. 이 세책본의 존재 목적은 상업적 이윤 추구다. 기름을 먹인 종이, 한 면당 11행, 한 행당 40자 내외로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쓴 글씨, 침을 묻히며 책장을 넘기는 습관까지 고려한 침자리, 빠짐없이 기록된 페이지 숫자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상업적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존재했다. 영화 <음란서생>에 나왔던 필사쟁이의 모습이 바로 ‘세책본’을 만들어내던 전문적 필사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방각본의 출판으로 대중적 확산된 소설
  막대한 제작비용으로 내용이 생략·축약되기도
  개인적 소장 목적이든, 상업적 이윤 추구 목적이든 필사본을 통해 소설 작품이 본격적으로 생산, 유통, 향유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양상이 전면적으로 확산된 것에 대해서 출판문화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조선시대 초기의 출판은 주로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아에서 담당했고, 사찰에서 불경과 관련된 것을 출판하거나 개인 문집 등을 사적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를 관각본(官刻本), 사찰각본(寺刹刻本), 사각본(私刻本)이라 칭하는데 기본적으로 상업적 유통과는 거리가 있었다. 방각본(坊刻本)은 상업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방각소에서 출판한 것을 말하는데 시장(市場)을 통한 유통을 전제로 한 출판이라는 점에서 상업적 이윤 추구가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방각본의 등장 시기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됐지만 최근에는 16세기로 보는 것이 지지를 받고 있다. 임진란 이후 학습교재류나 실용서를 위주로 출간하던 방각소는 18세기에 들어 <구운몽>, <임경업전>, <숙향전> 등 국문소설 작품의 출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필사본과 비교해 볼 때 방각본은 제작에 막대한 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다. 토판(土版)이나 와판(瓦版)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방각본은 주로 목판(木板)으로 제작됐다. 방각본의 제작에는 각수(刻手)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판목에 뒤집어 붙일 원고를 쓰는 ‘필사자’, 판목을 사용해 종이에 인쇄하는 역할을 하는 ‘인출장’, 제책을 담당한 ‘제책장’도 할 일이 많았지만 판목에 글자를 일일이 새겨야 하는 ‘각수’의 수고와 능력에 비할 수는 없다. 쌀 한 가마에 4원인 시절에 목판 한 장의 제작비가 20원이었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방각본 출판은 꽤나 규모가 큰 사업이었고 사업의 핵심에는 우수한 각수의 확보가 중요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방각에 필요한 판목과 종이 등의 재료 공급, 각수, 인출장 등 작업을 수행할 전문인력 보유, 유통을 감당할 일정 규모 이상의 시장 확보 등이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 요소였음도 알 수 있다. 방각본의 간행소가 서울, 전주, 태인 등지에 국한된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제작비용의 부담은 방각본의 내용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했는데 내용의 생략이나 축약이 매우 광범위하게 이뤄진 점이 주목된다.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 등이 존재하기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생략이나 축약을 통해 20장 내외로 분량을 압축하는 것이 방각본의 일반적 출간 방식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비평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현상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지만 상업적 출판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납득할 수 있으며 지식 또는 교양의 ‘대중적 확산’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방각본 이후 도입된 활자본
  출판문화의 핵심으로 부상
  1900년대 이후 납활자를 이용한 활판 인쇄가 도입되면서 등장한 ‘활자본(活字本)’은 출판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저렴한 양지의 사용, 활자를 이용한 빠른 인쇄 등을 통해 제작단가가 현저하게 낮아지게 되면서 장편물이 출판되기도 하고 육전소설처럼 저렴한 보급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한자의 병기, 대화 구분, 삽화 삽입 등 방각본에서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기도했다. 활자본은 방각본과는 다른 각도에서 상업
적 이윤 추구를 시도했던 것이다. 저렴해진 제작단가와 대량 생산 능력을 토대로 방각본이나 세책본보다 싼 가격으로 급증하는 독자의 수요와 요구를 충족했다는 점에서 활자본은 소설의 유통과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출판문화의핵심으로 부상했다.


  고독한 문제적 개인의 눈물겨운 쟁투, 그리고 그 쟁투의 향방에 대한 넘치는 관심과 애정이 소설 장르의 폭발적 흥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필사문화와 출판문화를 만나 눈부시게 확산되면서 이른바 ‘소설의 시대’를 열었다고 요약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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