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학술] 문화대혁명과 위화의 허삼관매혈기
[술술 풀리는 학술] 문화대혁명과 위화의 허삼관매혈기
  • 김경남 덕성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9.14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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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책 위화의 <허삼관매혈기>
  1996년 출판된 위화의 소설 『허삼관매혈기』는 중국의 1950-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 당시 중국의 농민들은 지독히도 가난한 삶을 살았는데 부인과 세 아들을 둔 주인공 허삼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허삼관은 피를 뽑아 팔면 한번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그는 위기 때마다 피를 뽑아 번 돈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시작한다. 어째서 허삼관은 그토록 팍팍한 생활을 해야 했을까? 허삼관 가족이 겪었던 중국의 1950-1960년대는 어떠한 시대였을까?


  20세기 중국역사와 정치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면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의 수립과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의 발발이 아닐까.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의 탄생은 사실상 중국공산당이 30여 년간 줄기차게 지속해온 혁명의 최종 결실이라고 한다면, 문혁은 봉건시대부터 시작돼 근대와 현대 시기를 거쳐 고착된 중국의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종식되면서 새로운 의식과 체제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문혁에 대한 평가를 두 가지 로 정리해볼 수 있다. 우선 평등사회의 구현, 사회주의 체제의 공고화, 하향 평준화로서의 인민들의 기아 구제, 세계 3대 군사대국으로 발돋움등의 긍정적인 면이 있고, 경제성장의 단절, 권력욕에서 비롯된 계급투쟁의 심화, 언론·민주·학술·사상의 자유 박탈, 문학예술에 대한 폭압적 탄압 등의 부정적인 면이 있다.

  격변의 중국 현대사 속
  인간들의 삶을 그린 작가, 위화
  문혁의 실상이 잘 드러난 영화로는 위화(余華)원작의 『인생』을 비롯해서 『푸른 연』, 『패왕별희』등이 있다. 인생』에서 지겹게 반복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라디오 선전방송은 마오쩌둥(毛澤東, 이하 마오)의 발상이었다. 그 결과 멀쩡한 사람도 세뇌될 정도로 계급투쟁은 극단적으로 미화, 과장됐고, 중국사회는 집단무의식과 광기의 도가니로 점차 변해갔다. 이에 비해 위화의 『허삼관매혈기』 속 문혁의 모습은 희미하고 모호해서 구체적 윤곽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당시 중국문단에 유행하던 신역사주의라는 조류 속에서 문혁 풍경을 의도적으로 보일 듯 말 듯 하게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신역사주의란 역사를 제재로 하되, 그것 자체에 비중을 두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의 배경을 빌려 그 시대 인간들의 삶과 현실을 사실감 있게 처리하는 창작방법과 유형을 뜻한다.
  작가 위화(1960∼)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문혁과 그 후 5년의 치과의사 경험이 자신의 글쓰기에 적지 않은 영감을 끼쳤다고 했다. 그의 대표작 『가랑비 속의 외침』(1991), 『인생』(1992),『허삼관매혈기』(1996), 『형제』(2005) 등의 장편소설은 세계적으로 그의 실력과 명성을 입증하고 있다.

  가족을 위한 허삼관의 매혈
  문혁 시기 팍팍한 삶 보여줘
  그 중 『허삼관매혈기』는 1950-1960년대가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당시에 청년이던 허삼관은 열심히 일했지만 생활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서 번 돈보다 한 번 피를 판 돈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그는 위기 때마다 피를 팔아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나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피나 팔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은 당시 사회문화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이기심 및 리베이트에 대한 풍자이다. 그가 피를 판 횟수는 모두 10회다. 그만큼의 위기와 시련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예컨대 1959년부터 시작된 자연대재해 시기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가족들에게 국수를 먹이기 위해서, 문혁 시기 이락이의 상사를 잘 대접하기 위해서, 같은 시기 맏아들 일락이의 간염 치료를 위해서 상하이까지 목숨을 건 매혈행군을 감행하는 모습들은 문혁의 실상이기도 하면서 허삼관이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헌신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문혁 당시 하소용과의 연애를 문제 삼아 허옥란비판대회가 열리고 또 외압에 의해 가족 비판대회가 열리면서, 남편과 아들에 의해 비판당해야 하는 장면이나 죽음을 앞둔 하소용의 혼령을 붙잡기 위해 치르는 의식 등 작품에 나열된 사건들은 황당함과 비상식의 일상화로 점철돼 있다. 작가 특유의 유머와 낙관정신이 있었기에 그처럼 고단한 삶을 해학과 풍자를 통해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작가는 이를 통해서 문혁 시기의 살벌하면서도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과 생활의지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오, 대약진운동 실패 후
  권력 회복 위해 문혁 시작
  그렇다면 문혁은 어떻게 발생하게 된 걸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두 마오 때문이다. 마오는 중국 수립 후 “자본가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고 했고, 류사오치(劉少奇) 역시 자본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착취 유공론’을 펼쳐 그들의 공로를 인정했다. 외관상으로 두 사람 모두 자본가의 존재와 역할을 긍정한 것 같지만, 마오는 달랐다. 그의 본심은 중국의 경제 건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 대한 계급투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인을 보는 관점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마오는 “지식은 존중했지만 지식인은 철저히 무시하면서” 깎아내렸다.
  문혁이 발생하게 된 내력은 대약진운동의 전개와 실패에서부터 살펴봐야 한다. 1958년 8월 17일부터 2주간 열린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전국민이 1천 70만 톤 철강 생산을 위해 분투할 것과 인민공사 설립을 의결”하면서부터 대약진운동은 시작됐다. 이 운동은 잘 알려진대로 철저히 실패했다. 중공 중앙당교가 펴낸 책자(1998)에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비정상 사망과 출산 감소로 인구가 4천여 만 명 줄어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는 마오의 과도한 실험 정신이 빚어낸 정책 실패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민들의 선진적인 의식만으로 낙후한 생산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는 천진난만한 환상이 현실에 부딪혀 박살 나버린 것이었다. 그 외에도 1959년부터 3년간 지속된 자연대재해 역시 대약진운동 실패의 원인이라할 수 있다.

  계급투쟁 강조한 마오
  10년의 비극 막 올라
  1962년 1월 11일, 베이징에서 5급 간부 이상 7,118명이 참석한 전례 없는 대형대회가 개최됐다. 중앙을 대표해 국가주석 류사오치는 그간의 좌경화를 비판하면서 “하늘이 내린 재앙은 3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인간이 만든 재난이다”고 마오를 비판하면서 당총서기 덩샤오핑 등 고위지도자들과 함께 소련식 집단지도체제를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마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그간 중앙당이 범한 모든 착오는 내 책임이 제일 크다. 간접적인 착오도 첫 번째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고 겉으로는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 후부터 자신이 후계자로 정했던 류사오치에 대한 의심과 경계심은 커져만 갔다. 마오는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치 2선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때부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수반으로 하는 실용, 개혁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경제상황이 몇 년 사이에 현저하게 좋아졌다. 농산물 44% 증산, 의료, 보건, 위생망의 초보적 구축으로 생활 수준도 향상됐다. 하지만 마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는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간의 모순,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과 자본주의가 가는 길에 발생하는 모순,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모순이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항저우, 쑤저우에 머무르며 자신의 계급투쟁 이론에 입각한 대규모 정치투쟁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홍위병을 사주했고, 린뱌오(林彪)와 사인방(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 장춘차오[張春橋], 왕홍원[王洪文]) 및 캉성(康生) 등과 함께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통해 1966년 ‘5.16’ 통지를 의결하고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발동시키면서 정적(政敵)이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및 그들의 실용주의를 수정주의로 몰아붙여 숙청, 척결했다. 이때부터 10년간의 비극의 막이 올랐고 수많은 이들이 비명에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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