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제41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 이루리(독어독문 3)
  • 승인 2015.11.2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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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의 기일 날 나는 복권을 샀다>

  아빠의 기일은 4월 13일. 이 날 나는 복권을 샀다. 하늘을 보며 아빠에게 ‘먼저 떠나서 나한테 미안하다면, 그리고 나를 그렇게 사랑했으면! 나 로또1등 한 번만 당첨되게 해줘 아빠.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딸 소원이다.’라고 말하며.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평소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아빠를 잃고 나서 7년 뒤인 2015년 6월 2일 나의 오빠가 죽었다.

  오빠는 나랑 1살터울이다. 나는 22살 오빠는 23살이었다. 우리 오빠는 23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신체 건강한 청년이었으며 영혼이 너무도 맑았던 23살 청년인 내 오빠. 오빠는 정신지체1급 장애인이었다. 오빠는 아빠가 돌아가신지도 몰랐고 엄마와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대 소변 또한 가리지 못하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청년이었다. 혹여 말이라도 한 마디 할까 혹여 글자라도 한 글자 쓸 수 있을까 해서 어릴 적부터 내가 오빠에게 글과 말을 가르쳐봤지만 다 소용없었다. 그렇게 오빠가 한 해 두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힘이 세지고 몸집이 커져서 엄마혼자 키우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오빠를 장애인 시설에 맡기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가족은 내가 대학에 오면서 모두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아빠는 하늘나라에, 엄마는 대천에, 오빠는 시설에, 나는 서울 할머니 댁에. 이렇게 서로가 흩어져 살다가 오래간만에 오빠와 나와 엄마가 한자리에 모였다. 오빠의 시체안치소에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을 보았고, 오열했고, 이 사실을,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오빠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자주 찾아가지 못해서 지켜주지 못해서 약속을 더 이상 지킬 수가 없어서 너무 미안했다. 그곳에는 오열하는 나와 엄마와 할머니가 있었고, 오빠의 모습은 너무 평온해보였다.
*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별로 삶의 의욕과 욕심이 없이 하늘을 떠도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았다. 학교도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았다가 공부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다가 그러다가 엄마한테 호되게 혼났다가 그냥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꼭 성공해야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우리 오빠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애인이라 제대로 된 좋은 옷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오빠가 그토록 좋아하는 고기를 마음껏 먹어보지 못하고 남들 시선때문에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고 시설에서 갇혀 사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우리 오빠를 위해 크게 성공하고 싶었다. 좋은 옷 입혀주고 좋은 것만 먹여주고 마당이 있는 넓은 집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아프지 않게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나에게서 아빠를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서 오빠까지 데리고 가셨다. 나는 한 순간에 살아야할 이유가 사라졌다. 엄마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너무나 많이 싸웠던 우리 둘. 이제는 내가 엄마를 지켜야 한다. 나는 이 집의 가장이 되었다. 오빠의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화장을 한 후 엄마와 나는 바다에 오빠를 뿌려주었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있는 곳에서행복하라고 해주면서. 다음 생에는 아프지 말고 멋지고 건강한 청년으로 태어나라고 하면서, 그리고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다시 한 번만 내 오빠로 태어나달라고 하면서. 오빠는 천국에서 아빠와 할아버지와 함께 행복할 것이다.

  오빠가 죽고 나서야 주위사람들에게 내가 사실 오빠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다들 내가 외동딸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는 오빠의 존재를 숨겼다. 오빠가 있다고 알려주면 몇 살이냐고 어디 있냐고 어디 대학에 다니고 있냐고 물어보기 때문에 엄마와 나는 내가 외동딸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다 오빠가 죽게 되니까 오빠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오빠가 죽고 나서야 내 입을 통해 내 형제가 존재했었음을 알릴 수 있었다. 너무 비참하고 원통했다. 나는 이기적이었다. 오빠가 죽고 나서야 오빠를 세상에 알리는 나는 정말 나쁜 동생이고 나쁜 년이다.

  할머니께서는 오빠가 빨리 죽은 것이 엄마에게 효도 한 것이라고 하셨다. 오빠가 빨리 효도를 하려고 그렇게 서둘러 갔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받아들이기 너무 가슴 아프지만 맞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나쁜년이다.

  오빠를 보내주고 난 다시 학교로 돌아와 수업을 듣고 기말고사 준비를 하고 레포트를 썼다. 제 정신일리 만무했다. 난 정신을 어딘가에 놓고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기말고사가 다 끝나갈 무렵 날 위로해주던 남자친구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가 날 떠났다. 그렇게 내 주위의 남자들이 모두 떠나갔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복권을 샀다. 혹시 내가 겪는 이 불행들이 나에게 어마어마한 행운을 가져다주기 위한 하늘의 계략일까 하고서 말이다. 아빠와 오빠와 내 생일을 번호로 찍어보고 엄마랑 아빠랑 오빠의 생일을 넣어서 해보고 또 남자친구와 이별한 날짜도 넣어보고 그 사람의 생일도 넣어봤다. 그런데 왜 나는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을까? 왜 내가 아닐까? 나는 내가 겪은 불행들이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데! 내가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불행들을 겪으면서 살았는데! 왜 도대체 왜 내가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거냐고! 계속해서 하늘을 수 없이 저주하고 쌍욕을 퍼부었다. 지랄. 세상이 말세다.

  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 복권을 샀었고 결과는 계속해서 꽝이었다. 그렇게 꽝을 겪다보니 내 인생이 꽝이 되었다. 계속되는 실패에 삶이 망가짐을 느끼고 나서야 복권을 끊을 수 있었다. 내 지난날들의 아픔을 보상해 줄 무엇인가를 계속 찾아 해매이던 나의 짧은 방황. 그 길의 끝은 더욱 더 큰좌절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매우 단단해졌다. 견고해졌고 좌절하지 않게 되었다. 무덤덤해 지고 체념하게 되고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철이 들었다. 세상과 나를 마주보는 법을 배웠고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트루먼 쇼’였으면 좋겠다. 갑자기 카메라들이 나와서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이 다 TV쇼였다고 하면서 지난 세월 수고했다고 괜찮다고 했으면 좋겠다. 이경규 아저씨라도 나와서 이건 다 몰래카메라였다고 ‘루리야 많이 힘들었지? 수고했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화내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제발 누가 이 일들이 다 거짓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자고 일어나면 다 깨버리는 아주 긴 22년 동안의 꿈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나를 떠나간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왜 나를 떠나야 했는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오른다.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나를 덮쳐버린다. 헤어 나올 수 없는 파도에 덮침을 당해버린 나는 복권이라는 튜브를 찾으러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발악했다. 그리고 이곳엔 튜브 따윈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수영하는 법을 배웠고 수영을 해서 그 파도를 이겨내었다. 이제 나는 파도를 무서워하지 않고 내가 원하면 파도와 맞서 싸울 수 있고 바다를 정복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을 마주할 수 있고 철이 들었다. 나는 강해졌다.

  바다를 정복한 나는 그 후로 복권을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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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머리가 언제 이렇게 길어졌지?’ 매일 보는 거울을 보며 낯설음을 느꼈다. 정말 정신없이 살았나 보다. 쓸데없이 길어져버린 머리를 보고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지독한 열병을 앓았던 여름이 지나갔다. 턱 막혔던 숨이 이제야 쉬어지고 이제는 슬프지만 잘 웃는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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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끔찍했던 지난 3달은 훌쩍 지나갔고 이
제 찬란한 가을이 되었다.


<제41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수상소감>
   <아빠의 기일 날 나는 복권을 샀다>는 벼랑 끝에서 주저앉아 길을 찾던 2015년의 저를 고스란히 녹여낸 작품입니다. 지난 날의 저는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저의 감정과 힘들었던 일, 그리고 집안 사정과 같이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제 품 속에 감싸고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보여주지도 않고 혼자서 감내했습니다. 그러다 저의 품에 있던 저의 가장 큰 보물인 오빠를 떠나보낸 후 제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아서 저를 짓눌러버렸습니다. 몸을 일으킬 수도 없어서 침대에만 누워서 몇 날 며칠을 보내기도 하고 복권을 사면서 기적을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언제나 그래왔듯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굉장히 많이 울었습니다. 저 자신을 원망도 많이 하고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냐고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글이라는 대나무 숲 속에 제 자신을 토해내고 나면 피를 토하고 득음을 하는 것과 같이 제 자신이 더 단단해 지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후~’ 하고 숨이 쉬어집니다.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글마저 쓰지 못했으면 삶의 무게에 한 없이 가라앉아 떠오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글을 써나가면서 계속해서 대나무 숲에 소리를 지르도록 하겠습니다. 끝없이 단련시키면서 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제게는 너무나 소중해 두 손으로 고이 포개어 뒀던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온전한 저의 이야기를 가슴의 울림이 있는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는 목표입니다. 10년 안에 이 글을 보고 있는 분들의 가슴 속에 노크를 할 수 있는 작가로 찾아오고 싶습니다.

  저는 이 목표를 제 이름처럼 꼭 이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너무 감사하고, 지랄 맞은 손녀랑 같이 사느라 고생하시는 할머니, 그리고 아빠와 오빠에게도 너무 그립고 사랑하고 감사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상을 주신 덕성여대신문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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