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가죽나무 그늘에서
[교수칼럼] 가죽나무 그늘에서
  • 이명찬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5.24 12: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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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소요유>편에는 나무 이야기가 하나 나온다. 한자로 저(樗)라고 쓰는 가죽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빨래를 생업으로 하는 이들이 손 안 트게 하는데 쓰는 하찮은 약이 몇 날 며칠이고 물에 젖은 상태에서 전쟁에 임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크게 쓰일 수 있음과 유사한 예로 장자는 가죽나무의 쓰임을 들고 있다. 불땀도 약하고 재목으로도 별 쓸모가 없어 평시에 아무도 도끼질 하지 않는 이 나무는 그러므로 크게 자라 큰 그늘을 늘인다는 것, 따라서 그 아래 곤고한 많은 이들이 들어 쉴 수 있는 큰 미덕을 지녔다는 것이다. 무용한 것의 큰 쓰임, 즉 무용지용(無用之用)에 대한 비유이다.

  조선(祖先)들이 나무 이름을 지을 때 무어 큰 의미를 담으려고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갓 짐작에 지나지 않는다. 소나무를 가리키는 ‘솔’이라는 소리가 ‘나무 중 으뜸이나 머리’라는 뜻에서 머리 수(首)를 음차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인 헛소리다. 어쩔 수 없이 소나무와 일생을 보내야 했던 저 산야의 이름 없는 무지렁이들이 그런 언어학적지식과 의도로 무장하고 사물의 명명(命名)에 매달렸다는 뜻이니 어찌 우습지 않은가. 선조들은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면 그 열매의 이름으로, 그게 아니면 쉽게 눈에 띄는 나무의 생태적 특성을 살려 직설적으로 이름 붙였을 뿐이다. 살구나 감이 열리니 살구나무, 감나무요 껍질을 불에 태울 때 그 소리가 자작자작 나니 자작나무일 뿐인 것이다. 그리 생각해 보면 솔은 그 열매인 솔방울이나 소나무의 어떤 생태에 관련된 이름일 것으로 짐작된다.

  ‘죽’이라 불리는 나무가 있었다. 곁가지도 치지 않고 위로 죽죽 잘 자라는 나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지금도 충청 이남의 해안에서 종종 쓰이곤 하는 이름이다. 그러던 어느 때부터인가 ‘죽나무’ 비슷한데 그것은 아닌 나무가 삼남의 해안가에 나타나 자라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래 우리의 무지렁이들은 그 나무에 가짜 죽나무라는 뜻에서 ‘가죽나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죽나무’는 ‘참죽나무’가 되고.

  이 ‘참죽’은 참으로 쓸모가 많다. 이른 봄에 솟는 여린 눈엽(嫩葉)은 그대로 훌륭한 봄나물로서 절집 부각의 중요 재료였다. 살짝 데쳐 말린 위에 고추장풀 발라 구우면 참으로 별미다. 뿐이랴 그 목재는 고운 무늬와 강퍅하고 곧은 성질로 해서 고가구의 뼈대로 오랜 전통의 한가운데를 누벼 왔다. 그래서일까 절집에서는 참죽나무를 참중나무라고 읽어 좋은 중 되려면 반드시 친해야 하는 나무로 칭송해왔다. 한자로 진승목(眞僧木)이 참죽을 가승목(假僧木)이 가죽을 가리킨다니 재미있다. 살아있는 좋은 참죽나무가 각 도의 유수한 절집 근처에 자라고 있는 예가 많아 그 친연성이 새롭기도 하다.

  경상도에는 이 나무나 이름들이 뒤늦게 도입됐던 모양이다. 다른 지역의 참죽나무를 여기서는 가죽나무 혹은 까죽나무라 부른다. (그러니 필자는 사실 어릴 때부터 수없는 까죽나무 순을 먹어왔던 셈이다.) 그러면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 “그러면 진짜 가죽나무는요?” 우습게도 경상도에서 그 이름은 ‘개가죽나무’다. ‘개’ 혹은 ‘가’가 붙어 원래 종보다 못하거나 좀스러운 물태를 드러내는 법인데 그 둘을 한꺼번에 붙이고 있으니 가죽나무는 경상도에 와서 심하게 그 무용성을 뽐내는 중이라고 볼 수밖에.

 
눈 뜨고도 배가 가라앉고 이유 없이 칼부림 당해 생목숨 버리는 이 엄혹한 시절에 한가하게 나무 이야기나 하고자빠져 있느냐고 당신은 내게 물을 법하다. 그러나 혹시 우리 지금 너무 얼이 빠져 원래 그러해야 할 면목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나 대학, 공무원과 학자들의 진면목을 감추려고 사람들의 이목을 홀리고나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대학의 연구와 교육 자체의 역할이란 원래 가죽나무나 은행나무 혹은 회화나무 그늘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적으로 무용한 어떤 것이고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인두겁을 쓰고 미쳐 날뛰는 가짜들까지 감싸 안으며 한 오천년 변하지 않는 그늘을 드리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물리학과 수학들이 해 온 일과 가야할 길을 생각해 보라. 돈 버는 기업에 필요한 인재는 그 기업이나 국가의 해당 부서가 책임지고 돈 들여 만들면 될 일. 그것을 왜 대학에 요구하는가. 자기들의 무신경이 부른 정원 초과라는 참사의 책임을 왜 대학에 전가하는가. 몇 백 억 돈을 미끼삼아 이 나라의 대학들을 줄 세우는 이 살풍경 앞에 무능하고 손 하얀 인문대학교수는 자꾸만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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