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학술] 청조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건립
[술술 풀리는 학술] 청조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건립
  • 김형종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 승인 2016.06.07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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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1987)>
  영화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청 말, 자금성 안에서 푸이는 서태후에 의해 황제로 군림한다. 그러나 신해혁명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던 궁의 바깥세상에서 푸이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혼란스럽던 청 말, 푸이는 어떻게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됐을까. 그리고 그의 배후에 있던 서태후는 누구일까.



  영화 ‘마지막 황제’
  영화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宣 統帝) 푸이(?新?? 溥儀. 1906-1967)의 일대 기를 근거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1987년 영화로 만든 것이다. 푸이가 나중에 쓴 자서전인 『나의 전반생』이라는 책과 그에게 동정적이었던 국인 가정교사 레지널드 존 스턴이 쓴 『자금성의 황혼』(이 책은 1934년 런던에서 출간됐는데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 아주 좋은 번역본이 출간됐다)이 사실 이 화의 줄거리를 제공해줬다. 영화는 오스카 금상을 받는 등 세계적으로도 널리 관중을 모았고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에 개봉돼(2015년 재개봉) 지금까지 20세기 초 청 말·중화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의 내용은 1950년 44세의 푸이가 소련군의 감시 아래 중국인 전범들과 함께 중국에 돌아와 황제 시절의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908년 자식이 없던 광서제(재위 1875-1908)가 사망하자 곧바로 서태후에 의해 그 후계자로 지명 된 푸이(광서제 동생의 아들이었다)는 즉위 3년 째 신해혁명을 당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자금성 안에서만은 ‘황제’ 로 살아가던 푸이는 1924년 북경 군벌에 의해 자 금성에서 갑작스레 축출 당한다. 이후 일본의 도움에 의존하게 된 푸이는 나중에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괴뢰’ 황제로 즉위했지만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소련군의 포로가 됐다가 중국에 다시 송환됐던 것이다. 학습과 개조 교육을 받고 1959년 마오쩌둥에 의해 특별 사면으로 석방된 푸이는 북경 식물원의 노동자로 평범한 시민의 일상을 경험하다가 1967년 사망했다.

  서태후·광서제,
  그리고 푸이의 황제 등극

  푸이가 마지막 황제로 등극했던 청나라는 17세기 초 여진족의 웅 누르하치가 1616년에 세운 후금에서 시작됐다.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홍타이지가 1643년 급사하자 막내아들 순치제가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했으며 순치제는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정 복하면서 중국을 지배하는 황제로 즉위하게 됐다. 이 때문에 청나라의 역사를 1644년에서 1912년까지 268년으로 산정하기도 한다. 이후 청나라는 한족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명나라의 역을 모두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18세기를 거치면서 몽골과 신장, 티베트까지 정복해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큰 번영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관료제의 부패와 급격한 인구 증가 등으로 급격한 내부 위기에 직면한 청나라는 나아가 후반에는 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급속한 붕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청나라의 마지막 50년 동안 대부분의 시기에 권력을 장악했던 것은 함풍제(재위 1850-1861)의 유일한 아들 동치제(재위 1861-1874)를 낳았던 서태후(태후는 황제의 어머니를 가리킨다)다. 나이 어린 동치제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면서 전권을 장악한 서태후는 동치제가 젊은 나이에 아들도 없이 사망하자 여동생의 아들을 불러들여 광서제로 즉위시키면서 여전히 ‘태후’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광서제는 서태후의 괴뢰로서 지낼 비운의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광서제는 성년이 된 다음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권력의 누수를 우려한 서태후의 반격으로 자금성 안의 호수 가운데 섬에 홀로 유폐되는 비극을 당했다.

  광서제는 1908년 10년 동안의 유폐 생활 끝에 3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20시간 정도가 지나지 않아 서태후가 뒤를 이어 사망 했다. 바로 그 직전에 네 살밖에 되지 않은 푸이 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지명됐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초반은 이 부분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출처/위키백과광서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푸이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광서제와 서태후
  이렇게 광서제와 서태후가 공교롭게도 하루 사이를 두고 너무도 가까운 시점에서 세상을 뜬 것 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자신이 죽고 광서제가 다시 권력을 되찾는 것을 두려워한 그녀가 미리 손을 써서 독살한 게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심은 광서제의 사망 이후 100년이 지난 다음에야 사실로 확인 됐다. 공식기록에 의하면 광서제는 양실조와 다양한 질병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일컬어져 왔지만 몇 년간의 과학적인 검증을 거친 다음 2008년 광서제의 사인이 급성 위장형 비상 중독으로 확인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1938년 무덤이 도굴당한 광서제의 시신과 관은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1980년대에 보존 작업이 이뤄졌는데 다행히 유품 가운데 모발과 수의 등에 대한 검사가 가능했던 덕분이었다. 광서제가 죽기 사흘 전 요구르트를 먹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던 누군가의 회고는 6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그 진정성이 확인됐다. 광서제의 억울함과 비참함은 사망 100년 뒤에 가서야 진상이 제대로 드러났다. 황제권의 장악을 둘러싼 이모와 조카 사이의 이러한 비극은 그야말로 권력의 추악한 속성을 잘 드러내 준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3년도 되지 않아 청조는 무너졌다. 당시 청나라는 이 무렵 확산되기 시작한 입헌제 실시의 요구에 부응하는 척 시늉을 하면서도 최대한 황제권의 절대성을 유지하고자 저항했다. 그러나 서태후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권력의 공백은 너무 컸다. 또다시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서 사실상 이런 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청조가 이 무렵 멸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황제권의 찬탈을 통해 50년 가까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서태후가 남긴 유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황제권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거대한 권력의 중심에 공백을 만든 서태후의 유산은 이후 중화민국에도 그대로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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