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지와 사랑'이 시작이었을까
[교수칼럼] '지와 사랑'이 시작이었을까
  • 주승희 법학과 교수
  • 승인 2016.09.2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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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2학년 어느 봄날 체육대회를 마치고 일찍 귀가하던 길, 신호등 녹색불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날따라 길게 느껴진 나는 몸을 돌려 바로 앞 서점에 들어갔다. 목적 없이 뒤적뒤적한 책들 중에 우연히 고른 책이‘지와 사랑’이었다. 이성적 성향의 나르치스와 감성적 성향의 골트문트의 삶을 엿보며, ‘싯다르타',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등등 헤르만 헤세의 다른 작품들을 연이어 찾아 읽으며 삶의 의미와 방식에 대해 나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대학 진학을 앞두고도 특별히 가고 싶었던 학과가 없던 내게 문득 헤세가 떠올랐고, 그의 작품을 원서로 읽어보자는 마음만으로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했다. 졸업을 1년 앞둔 해에도 여전히 진로가 미정이었던 나는 전공자로서 최소한 독어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귀국 후 거처는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의 말을 부모님께 드리고, 자취방의 보증금을 빼내) 독일 Bonn대학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고 날씨마저 궂은 날이 많던 1993년 Bonn의 봄, 어학 수업 외에 달리 시간 쓸 일이 없었기에 기숙사 옆 라인 강을 따라 자주 산책을 했다. 혼자 걷는 걸음에 절로 생각이 많아져 처음으로 내 지나간 삶과 현재 모습, 내 가족과 나라를 내 안이나 곁이 아닌 앞에 마주 놓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내가 바라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불합리한 것을 싫어하고 불공평한 것을 참지 못해 꼭 말로 뱉어 옳고 그름을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가 살아가야 할 1990년대초반의 한국 사회는 나 같은 여자가 직장인으로 살기에는 홀로 기분 상하고 괴로울 날이 많아 보였다. 그때 정한 진로가 법조인이다. 그래도 법률가라면 남녀차별을 덜 겪을 것이고, 사회 내 부조리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직역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왕 다시 시작하는 공부 제대로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던 해에 당시 법학과가 있었던 이웃 학교로 진학했다. 훗날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을 때에는 일찍 공부해둔 독어 덕에 남들보다 짧은 기간 내에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여러 복이 겹치고 겹쳐 모교의 교수로 부임해 이제는 학생들에게 법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삶을 누리고 있다.

  2016년 가을, 우리사회의 불합리함과 불공평함에 대한 나의 관심과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나의 제자들이 졸업 후 겪게 될 노동시장에서의 차별, 정치·사회·문화·가정 곳곳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게 될 부당한 처우에 관심을 갖는 일이 법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학생들이 사회 여러 모양의 부정적인 단면들에 대해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난 20여 년 사이에 여성들의 공무원 합격에 실질적 걸림돌이었던 제대군인가산점제와 남아선호사상을 부추겼던 호주제가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폐지됐다. 직장여성의 산전후 휴가기간이 2개월에서 3개월로 확대됐고, 육아휴직제도가 도입·확대됐다. 직장 내 성희롱의 규제를 위한 법이 제정됐고, 국적 취득 시 모성과 부성을 차별했던 국적법이 전보다 평등하게 개정됐다. 적극적 우대조치가 도입돼 국공립대학교의 여교수 채용이 늘어났고, 여성 국회의원의 수도 대폭 증대했다. 최근 이슈가 된 여성 혐오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뿌리가 깊지만 근래 우리사회에 국한시킨다면) 어찌 보면 우리나라 여성들의 권익이 꾸준히 향상되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과도기적 산물일 수도 있다. 과거 누렸던 권리들이 눈앞에서 하나 둘 줄어들고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보며 어찌 모든 남성이 이를 환영하며 웃기를 기대할 것인가. 필요 이상의 피해의식이나 두려움, 적대감 없이 성숙한 자세로 함께 대처해나갔으면 좋겠다. 아직도 고치고 다듬어야 할 제도가 산적해보일 수 있지만, 우리사회의 양성평등 역사는 계속해서 진행 중임을 우리 학생들도 함께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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