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학술] <레미제라블>을 통해 본 프랑스혁명
[술술 풀리는 학술] <레미제라블>을 통해 본 프랑스혁명
  • 박윤덕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16.10.11 1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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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2012)>
  영화 <레미제라블>은 나폴레옹 체제가 무너진 후 프랑스 민중의 팍팍한 현실을 녹여낸 작품이다. 이 영화 속 프랑스 민중은 계속해서 또 다른 혁명을 시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렇다면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프랑스혁명 후에도 프랑스 민중은 왜 계속해서 혁명의 목소리를 냈던 것일까?



  ‘<레미제라블>을 통해 본 프랑스혁명’이란 주제로 원고를 청탁받고 2012년 12월 대선 다음날,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페이스북에 간단한 소감을 적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대미를 장식하는 ‘민중의 노래’가 울려 퍼지자 애써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도 ‘내일은 오리니!’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영화가 2012년 대선 결과에 분노하고 절망했던 이들을 위한 ‘힐링(healing)’ 영화라는 평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과 대비되는 180여 년 전 프랑스 민중의 참담한 상태를 동정하면서도, 바리케이드의 학생들을 배신하는 그들의 비겁함에 경멸과 분노를 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마도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끝까지 인간애를 버리지 않은 장 발장이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계속해서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상당 부분 실화에 바탕을 둔 대하소설로 19세기 초반의 격동기를 살아가야 했던 프랑스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장 발장이라는 불쌍한 사나이의 인생을 통해서 조명하고 있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있지만 이야기는 혁명이 끝나고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한 시점에 시작한다. 사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한 바리케이드는 1789년의 혁명도 1830년의 7월혁명도 아닌 1832년 6월 5일 벌어진 파리 폭동이 그 배경이다. 이때 민중협회 회원들, 학생, 수공업자, 노동자들이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계기로 봉기했지만 라파예트, 클로젤 등 공화파 지도자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정부군이 파리 북동쪽의 봉기 지역을 포위·진압했다. 끝까지 항거한 봉기자 8백 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체포된 자 가운데 7명이 처형되고 82명이 유배됐다.

  그들은 왜 7월혁명이 일어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또 다른 혁명을 시도했을까? 프랑스는 1789년 이래 여러 차례 혁명을 일으킨 나라이기는 하지만 왜 또 다시 혁명의 깃발을 들어야 했을까? 이제 <레미제라블>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역사의 맥락을 되짚어보자.

  혁명의 시작,
  프랑스혁명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제3신분’(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이라 불린 평민들이 들고 일어나 부르봉 왕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사건이다. 혁명을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는 정부의 재정적자와 흉작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봉건적인 농업경제의 위기, 신분제의 불평등, 그리고 왕정의 정치적 무능에 대한 국민적인 불만이었다. 7년전쟁에서 영국에 참패한 프랑스는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지만 특권계급의 반발로 번번이 개혁이 좌절됨으로써 혁명적 상황을 맞이하게 됐고, 결국 루이 16세는 ‘사표를 내듯’ 삼부회 소집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 초기에는 바스티유 함락에서 드러나듯이 민중의 지지를 받아 절대왕정을 타도한 부르주아 대표들이 자유주의 귀족과 손잡고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웠다. 인민주권과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천명한 <인권선언>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부자들만의 정부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이 정도의 양보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해 해외로 망명하려다가 바렌에서 민중들에게 체포됐다. 루이 16세의 속셈은 뻔했다. 해외로 망명해서 처가인 오스트리아의 원조를 받아 혁명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왕권을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국왕의 배신을 목도한 프랑스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 유럽의 왕국들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 정부는 다수의 적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상퀼로트’라 불린 민중을 동원해서 혁명 군대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 전쟁에 투입된 민중들은 그 대신 평등한 참정권, 망명자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 교육 및 공공부조의 권리 등을 보장받았다. 이렇게 수립된 혁명 부르주아지와 민중의 동맹이 반혁명으로부터 혁명 프랑스를 지켜냈다.

  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단한 민중들
  하지만 새로운 정치체제가 사회문제를 모두 해결하지는 못했다. “혁명은 혈통에 의한 신분제를 돈에 의한 신분제로 대체했을 뿐”이라는 조롱을 받았을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됐다. 공포정치와 최고가격제 덕분에 일시적으로 민중들의 생활이 나아지는 듯했지만 농사지을 땅과 작업장의 일자리는 여전히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전쟁 중에 군수산업의 성장과 함께 시작된 산업화로 말미암아 가난한 노동자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됐는데, 우리의 여주인공 팡틴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797년 그라쿠스 바뵈프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토지 개혁을 주장하며 이른바 ‘평등주의자들의 음모’라 불린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을 시도한 바 있다.

  자코뱅의 혁명 독재와 공포정치가 군주제 유럽의 공격과 내부의 반혁명으로부터 혁명 프랑스를 구해내자 부유한 부르주아들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를 축출하고 ‘총재정부’라 불리게 될 온건 공화파 정부를 수립했다. 중도파라 불린 이들은 혁명 독재의 악몽이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재산제한선거제를 부활시켜 민중의 정치 참여를 제한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축소시키는 우를 범했다. 그 결과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자 그들은 나폴레옹을 앞세워 무력으로 반대세력을 제압했고, 결국 나폴레옹의 군사독재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10년간의 혁명이 끝나고 나폴레옹의 시대가 열렸다. 1815년 워털루의 패배 이후 부르봉 왕정이 복고됐지만 부자들의 권력은 유지됐다.

  7월혁명과
  파리폭동의 발발
  부르봉 왕조가 부자들의 권력을 확실하게 지켜주지 못하자 부르주아지는 다시 한번 혁명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1830년 7월혁명이다. 1789년의 혁명이 민중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자코뱅 독재로 진전됐던 역사적 경험을 교훈 삼아서 그들은 부르봉 왕가의 작은 집인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립을 왕으로 추대했다. 루이 필립의 7월왕정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을 돌보는 정부는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1832년 6월, 마리우스와 그 친구들은 민중혁명의 이상을 품고 봉기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봉기는 실패했지만 1848년 2월 또 다른 혁명으로 제2공화정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반세기의 혁명,
  그러나 남아 있는 아쉬움
  반세기에 걸친 혁명의 드라마는 그 숭고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프랑스의 현실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 신분제의 제약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권력은 지배 엘리트의 수중에 있었다. 민중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고, 그들의 정치 참여는 제한됐다. 그들에게는 권리보다 의무가 더 익숙했고, 의무를 피하기 위해서 정의를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의 경험은 민중을 각성했다. 처음에는 부르주아의 혁명이념을 그들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곧이어 그들의 요구를 담아 새로운 혁명이념을 만들어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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