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학술] 고려 시대 국가와 불교
[술술 풀리는 학술] 고려 시대 국가와 불교
  • 강호선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16.11.1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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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는 고려 초대 왕 태조부터 제4대 황제 광종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낸 타임슬립 드라마다. 고려 초기는 신라의 국교였던 불교의 영향 때문인지 드라마에는 불교적 요소가 꽤 나타난다. 그렇다면 실제 드라마에서처럼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했을까? 고려 시대의 불교가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자.


 

 

  골수에 깊이 박힌 불교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의 유훈은 정책 결정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국왕은 물론이거니와 신료들도 태조의 유훈에 의거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불교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여서 숭불의 근거도 태조에서 비롯했고, 억불의 근거를 태조에서 찾기도 했다. 태조 왕건은 백성들이 불교를 믿고 있어 민심 안정을 위해서는 불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가 남긴 글과 말에서 잘드러난다. 태조의 <훈요10조> 중 제1조는 ‘고려의 대업은 여러 부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해 각기 그 업을 닦도록 하라’는 당부로 시작하고 있다. 또한 후삼국 전쟁에서 승리한 뒤 개태사를 창건하며 직접 지은 기도문에서 왕건은 통일전쟁에서의 승리는 부처와 신령의 은덕이라 하며, 고려의 안녕과 발전에 불교가 도움을 주기를 기원했다. 불교를 폐지해야 한다는 유학자 최응의 건의에는 불교가 사람들의 골수에 박혀 있는데, 후삼국 통일 후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불교를 폐지하면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 해 국가 운영에 있어서 불교가 필요함을 언급했다. 후삼국의 혼란기 호족에 대한 고승의 지지가 민심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할 정도로 불교는 현실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왕건은 이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국가의례도 불교로
  태조 이래 고려에서 불교는 민심의 안정을 위하고, 왕조의 복업을 길게 누리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종교였다. 아울러 태조를 비롯한 지배층이 불교를 깊이 믿고 있었던 것도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된 이유였다. 고려는 국초부터 정치는 유교로 하겠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불교는 종교 영역에 머물게 했다. 하지만 임금이 불교를 신앙하고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 부처의 외호가 필요하다고 믿는 사회라면 불교를 정치의 영역에서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고려의 국가의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려 국가의례에서 불교는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국가의례는 임금을 중심으로 하는 계서적인 통치 질서를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백성들에게는 소속감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의례에 수반되는 연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는 백성과 임금이 함께 즐기는 요소가 포함돼 있어 민심 통합의 기능이 있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가 <훈요>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는 행사’라고 하며 반드시 개최할 것을 당부한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는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의례였다. 고려의 상원연등회는 부처에게 연등을 공양하는 불교 행사인 동시에 국왕이 봉은사에 조성된 태조진전에 행차해 재(齋)를 올리는 의식이 가장 중요했던 태조신앙의 장이기도 했다. 팔관회 역시 원래는 신도들이 단 하루만이라도 출가자가 지켜야 하는 계를 지키며 수행하는 불교 행사였지만, 고려에서의 팔관회는 고려 국왕이 중심이 된 천하질서 속에서 군신 간의 위계를 확인하는 잔치였다. 이 외에도 호국적인 불교 의례 백고좌회도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이러한 행사들은 불교 행사이거나 혹은 불교에서 기원한 행사임에도 절이 아닌 궁궐에서, 국왕이 주관하는 왕의 의례로 개최됐다. 또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표방하는 전근대 국가에서 종묘는 선대 국왕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의례 공간이지만, 고려에서는 사찰에 조성된 진전이 그 역할을 나눠 맡았다. 심지어 종묘보다 진전이 먼저 만들어졌고, 그중에서도 광종이 창건한 봉은사의 태조진전은 고려 국왕권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왕건에게 숭불은 개인적인 신앙이었을 뿐만 아니라 삼한일통을 이룬 국왕의 통치에도 유용한 것이어서 국가 운영에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라하대의 혼란과 태봉의 정치를 직접 경험했던 왕건의 입장에서 숭불로 야기될 수 있는 불교의 폐단은 향후 고려를 이끌어 나감에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였다. 태조는 <훈요>에서 절을 함부로 많이 짓는 것과 그로 인한 경제적 혼란을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 들었으며, 사원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과, 불교와 정치세력이 결탁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

  고려의 숭불은 불교는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불교가 그 사회적 기능을 온전히 다할 수 있게 하면서도 신라 말과 같은 폐단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했다. 고려에서 관료제도에 준해 불교 교단을 운영하던 제도인 승정은 이러한 목적에서 시작됐다. 교단에 대한 제도적인 관리와 통제가 이루어진 것이다. 승정은 광종대 처음 실시된 것으로 알려진 승과를 통해 체계화됐는데,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는 승계와 승직이 주어졌다. ‘대선사’나 ‘승통’은 승과에 급제한 승려가 평생에 걸쳐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승계였다. 절의 주지는 승직이어서 승계의 높낮이에 따라 주지를 맡을 수 있는 절의 격이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국왕은 승정의 최종결정권자로 불교의 인사권과 경제권은 승정을 통해 국왕에게 수렴됐다.

  보살계제자 고려 국왕
  고려의 국왕은 이처럼 승정의 최고 정점에서 교단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대몽항쟁기 대장경을 새로 판각하면서 이규보가 쓴 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고려는 ‘불교를 받들고 믿는 나라’였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적 권위는 세속적 권위인 왕권보다 우위에 있었다. 당대의 최고 고승을 왕사와 국사로 임명하는 것은 숭불국가로서의 상징적인 제도였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왕사와 국사에 대한 임면권은 국왕에게 속하는 것이어서 현실적으로는 왕권이 교권을 장악했다. 왕권이 제도적으로 교권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불교를 받들고 믿는 나라’인 고려의 국왕은 태조 왕건이 그랬듯 보살계를 받고 지킴으로써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이 되고자 했다. 불교를 믿고 보호하는 ‘보살’인 국왕이 다스리는 고려는 보살의 자비행이 구현되는 불국토로 상정될 수 있었다. 이러한 보살이 다스리는 청정한 불국토가 천재지변이나 외적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게 되면 부처와 여러 보살 및 신중들이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국가적인 믿음은 고려가 거란과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조성했던 원동력이었다.
 
  고려는 불교 국가?
  불교가 정치적 기능을 했음에도, 고려의 위정자들과 지식인들은 정치는 유교, 신앙과 개인의 심성 도야는 불교로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내세웠다. 또한 도관을 설치하고, 초제와 같은 도교의례도 개최하는 등 도교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관리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풍수와 도참은 고려 건국에 정당성을 부여한 이념이자 국도를 운영하는 원리로 작용했으며, 고대로부터 이어온 전통신앙은 민간에서 여전히 성행했다. 일견 불교 국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고려는 유교와 불교를 두 축으로 굴러가는 수레이면서도 다양한 전통과 신앙이 공존한 다원적인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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