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기억
흘러가는 기억
  •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 승인 2017.03.30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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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기억은 안녕합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빨리 외우고 오래 기억하기를 바란다. 영어단어나 강의 내용을 잘 기억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대개는 시험을 잘 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익과 취직 걱정이 없는 동물들도 기억을 한다. 기억은 왜 필요한 걸까?
  기억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따져보는 데 필요하다. 경험을 기억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뇌 부위인 해마가 손상된 환자들은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미래의 일을 상상하거나 계획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그래서 역사든, 일기든, 사건 진술이든, 기억은 지금과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기억의 양 vs 요점
  어떤 행동을 할지 따져보는 데 쓰이려면 기억은 어떤 형태여야 할까? 가나다 순으로, 혹은 시간 순으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저장하면 될까? 마음에 드는 니트 한 벌을 사려고 검색했는데 수천 가지의 니트가 나왔을 때의 복잡한 심경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세밀한 정보가 지나치게 많으면 핵심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책 <새로운 무의식>에 따르면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솔로몬 세레셰프스키는 살면서 만난 모든 얼굴들, 그들이 한 말과 행동을 다 기억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의 얼굴도 표정이 바뀌거나 조명이 달라지면 다른 얼굴로 보였다. 친구를 알아보는데도 방대한 기억을 뒤져서 눈앞의 얼굴과 맞춰보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했다. 당연히 말의 요지를 이해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세레셰프스키는 자신의 처지가 사무칠 때면 기억을 종이에 적어서 태우곤 했지만, 불꽃도 그의 기억을 태워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세레셰프스키보다 핵심을 잘 파악하기에 간추려 기억하고, 그러다보면 잊어버리거나 잘못 기억하기도 한다. 다음 단어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자. 사탕, 시큼한, 설탕, 쓴, 맛있는, 맛, 이빨, 좋은, 꿀, 소다, 초콜릿, 하트, 케이크, 먹다, 파이. 이 단어들을 좀 더 살펴본 뒤에 손으로 가리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자.
  다음 단어들 중, 위 목록에 있던 단어를 모두 골라보자: 맛, 점, 달콤한. 연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목록에 없었던 ‘달콤한’이 목록에 있었다고 회상한다고 한다. 목록의 핵심에 따라 기억이 재구성됐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에 주의를 집중한다. 떠들썩한 개강 파티에서도 누군가 내 이름을 언급하면 귀가 쫑긋해지는 것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흥미를 느꼈던 것, 두려웠던 것, 기뻤던 것, 슬펐던 것들이 나에게 중요한 정보가 된다. 감정은 나의 생존과 번식에 중요한 상황에서 일어나, 중요한 정보를 더 잘 처리하고, 더 잘 기억할 수 있도록 뇌와 몸의 작동 양식을 조절한다.
  그래서 감정이 중요하다고 표시한 일은 기억도 잘 된다. 때로는 지나치게 기억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처럼 현재의 삶을 침해하기도 한다. 공포 감정은 뇌와 몸속에서 에피네프린 계열의 신호와 관련돼 있다. 그래서 공포스러운 사건이 장기 기억으로 고착되기 전에 에피네프린 계열의 신호를 억제하는 약물(beta blocker)을 복용하면, 사건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약화시켜 PTSD를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도 논의되고 있다.
  반면에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적당히 흘려버린다. 행인이 당신에게 길을 물어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10초쯤 이야기고 있는데 커다란 문짝을 든 이들이 당신과 행인 사이를 지나간다. 당신이 문에 가려 행인을 보지 못하는 몇 초 사이에 행인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그리고는 마치 아까부터 길을 물어보던 사람인 양 당신과 대화를 이어간다면, 당신은 행인이 바뀐 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변화 맹시). 김수현 급의 미남이 아니고서야 지나가던 사람1은 당신에게 별로 중요한 정보가 아닌 것이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가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사건의 어떤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뿐인가. 사건을 해석하는데 쓰이는 사전 경험과 지식이 다르고,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지의 입장도 다르다. 그러니 10초 전에 일어난 교통사고에 대해서도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나란히 앉아서 같은 영화를 보고서도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각자의 기억은 시작부터 다르다.

  기억의 변형
  시작부터 달랐던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변해간다. 기억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저장하는 녹음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기존의 지식과 신념에 경험을 끼워 맞추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틀릿이라는 연구자가 수행한 실험을 보자. 바틀릿은 피험자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 설화를 읽어주고 15분 뒤에 줄거리를 말하게 했다. 그리고 불규칙한 간격(몇 주나 몇 개월)으로 그들을 몇 번씩 다시 불러 줄거리를 말하게 하며 변화를 관찰했다. 피험자들의 기억은 잊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환상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요소들은 빠지고 새로운 부분이 추가되면서 어떻게든 ‘말이 되는’ 형태로 변형돼 갔다.
  이러니 어떤 말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말이 되는’ 기억도 달라진다. 피험자들에게 자동차 두 대가 추돌하는 짧은 영상을 보여주고, 두 차량이 부딪혔을 때(hit) 속도가 대략 얼마였는지 물어보면 응답의 평균은 시속 34마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두 차량이 박살났을 때(smash) 속도가 대략 얼마였냐고 더 강한 표현을 써서 물으면 응답의 평균은 시속 40.8 마일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더욱 말에 맞춰졌다. 일주일 뒤 피험자들을 다시 불러서 영상 속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보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깨진 유리조각은 없었다), 두 차량이 부딪혔을 때(hit) 속도가 얼마였냐는 질문을 받았던 그룹에서는 14%가, 두 차량이 박살났을 때(smash) 속도가 얼마였냐는 질문을 받았던 그룹에서는 32%가 깨진 유리조각을 보았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갱신되는 기억
  앞에서 기억은 지금(혹은 미래에) 어떤 행동을 할지 상상하고 결정하는데 필요하다고 했다. 기억이 이렇게 변해가면 행동을 결정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을까? 사실은 그 반대다. 나와 내 주변 상황이 끊임없이 변해가기에, 변화에 맞춰 행동을 수정하려면 기억도 발전 돼야 한다.
  그래서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변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서, 공포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공포스러운 사건을 떠올리게 한 뒤에 (기억이 변하기 쉬운 상태가 된 후에) 과거에 무서웠던 자극이 이제는 안전함을 학습시키면, 기억이 보다 수월하게 수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기억의 가변성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만, 반복되는 증인 심문 과정에서 기억을 왜곡시켜 의도치 않은 위증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기도 하다.
  나의 기억은 실제 있었던 일과는 다르며, 살면서 계속 바뀌어 간다. 서유럽 중심의 세계사와 네루가 쓴 <세계사 편력>이 크게 다르듯이, 기억도 어떤 입장에서 어떤 표현으로 떠올리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기억이 지금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나를 갉아먹는 기억으로, 때로는 나에게 힘이 되는 기억으로.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과거는, 지금의 당신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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