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이 주는 여유의 미학
두꺼운 책이 주는 여유의 미학
  • 아하프레스웹에디터 최순지
  • 승인 2004.05.22 2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행히도 영화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영화의 무대는 천국의 가기 전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일주일간 머물게 되는 사후 세계와 현세의 중간쯤 되는 곳이다. 기독교의 연옥의 개념과 비슷한 곳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연옥에서는 천국에 가기 전에 죄를 씻지만 이곳에서는 자신이 천상에서 평생 동안 지닐 현세에서의 행복한 추억을 선택하는 곳이다.

 얼핏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거나 큰 보상을 받은 날을 기억하고 槁紵?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일상적인 생활의 단편을 기억하고 싶어했다. 하교길 버스안 맨 앞자리에 앉아 맞던 상쾌한 바람, 엄마를 기다리며 대청 마루에 누워 봤던 벚꽃의 흩날림. 이런 추억들은 작지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추억들이다.

 이런 추억은 어떨까?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여름,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속이 빨갛게 익은 먹음직스런 수박을 잘라놓고 머리에는 두꺼운 책을 베고서 대자로 눕는다. 매미 소리는 음향 효과로 추가한다. 그리고 손에는 아주 두꺼운 책을 펴든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지만 어느새 책의 반을 읽어버린 내 모습.

 이런 추억을 갖을 수 있는 건 기말고사까지 남는 건 시간 밖에 없는 우리가 아닐까? 풍류를 즐기며 두꺼운 책을 여유롭게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우리가 많이 들어 봤음직한 고전들이다. 펄벅의 「대지」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르마조프 씨네 형제들」.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기 위해 절대 다이제스트 본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추억을 위해 세로줄로 된 책을 읽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두권의 책중 「카르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매우 여유로운 자세들을 지녀야만 읽어낼 수 있는 책이다. 워낙 방대한 에피소드와 사상을 내포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문제 의식을 깔끔하게 말해주기도 어렵다. 개인적인 간편함을 위해 인간과 신과 윤리의 문제라고 내 마음대로 이 책의 뼈대를 추려낸다 해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대심문관’ 이야기 부분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신론자의 윤리관과 유신론자의 윤리관을 대심문관과 이반을 통해 대비시킨다. 무신론자의 윤리관 입장에서 신에 의한 죄의식은 오히려 인간 세계의 바람직한 윤리를 파괴시킨다. 유신론자의 입장에서는 죄의식을 벗기 위해 신을 버린다면 그것은 인간 편의주의적인 윤리관이 되어버린다.

 인간과 윤리 그리고 신에 대한 고민을 연장 시켜보고 싶다면 사하키안이 지은「윤리학 : 그 이론과 문제에 관한 개론」을 읽어 보길 권한다. 윤리학 전체에 대한 개론서로서 어려운감이 있고 딱히 윤리와 신의 문제에 관해서만 다룬 책은 아니지만 성실한 내용은 윤리학과 철학의 지평을 넓혀 줄 수 있을 것이다.

 펄벅의 「대지」는 저자가 서양인이고 배경은 아시아의 대표 국가-서양인에게는-인 중국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고로 서양인에게 동양이라는 것은 신비하면서도 야만적인 것이다. 설혹 얼마 전 나온 ‘라스트 사무라이’와 같이 동양의 정신을 시기하는 문화가 늘었다 한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또한 또 다른 왜곡이다.

 그러나 펄벅은 동양인인 우리 자신보다도 「대지」의 주인공 왕룽과 그의 식구들을 통해 중국인의 삶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면서, 삶의 배경이 비슷했던 우리에게 찡한 여운을 안겨준다. 개인이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고려한다면 펄벅의 소설은 더욱더 가치를 갖는다. 물론 책의 구성이나 내용과 감동은 말할 필요 없이 과연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거머쥘 만한 작품이라고 감탄하게 만들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