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열사의 독립운동
이준 열사의 독립운동
  • 한상권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17.08.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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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학원 재단 건물인 해영회관, 이준 열사의 집터로 확인돼


  아름다운 나라를 꿈꾼 독립운동가
  지난 7월 14일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된 이준(李儁, 1859〜1907) 열사 순국 11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다. 이날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덕성학원 해영회관에서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 추념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이 열렸다. 덕성학원 재단 건물인 해영회관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될 당시 이준 열사가 거주했던 집터임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준 열사가 생전 안현(안국동)에 살았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주소를 특정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각종 문헌자료를 조사해 지번을 최초로 확인한 결과, 해영회관이 이준 열사 집터임을 확정했다.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분인데, 그중에서 가장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은 아마 이준 열사일 것이다. 이준 열사는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이선재(李璿在)이며,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이다. 법관양성소는 갑오경장 이후 근대적 사법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1895년 3월 평리원 내에 설치한 법관 양성 기관이다. 1895년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해 와세다대 법과에서 공부했는데, 이때 이준으로 개명한다. 그는 평리원(平理院) 검사로 임용된 우리나라 초대 검사 중 한 명이다. 법관양성소를 그들의 뿌리로 여기고 있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앞에 이준 열사 동상이 서있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동상에는 이준 열사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다.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이다.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조국의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이준 열사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나라가 군사 대국이나 경제 강국이 아닌 문화국가가 되기를 꿈꿨다. 강한 나라가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를 원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역사적 의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내고 을사늑약을 체결하려 들자 이준 열사는 반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에 고종은 그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헤이그에 도착한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인의 특사는 회의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네덜란드 외무성이 1905년 을사늑약에 따른 일본에게의 외교권 이양을 근거로 들며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참석하고자 했던 회의에, 바로 그 조약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3인의 특사는 좌절하지 않았고, 국제주의자 모임에서 이위종 열사가 연설을 하는 등의 여러 노력을 했다. 그런 가운데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가 숨을 거뒀다. 당시에 이준 열사가 ‘자결’을 했다는 신문기사와 루머가 팽배했지만, 이 루머는 민족적 울분이 팽배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여져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준 열사의 죽음은 분노로 인한 ‘분사(憤死)’일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만국평화회의가 끝나고 난 뒤, 일본은 이 특사 사건을 거꾸로 이용해 고종의 폐위를 강요했다.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고종 황제를 폐위시킴으로써 일사천리로 강제병합을 추진할 수 있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당시에는 실패한 프로젝트였지만 110년이 지난 오늘에는 역설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됐다. 1910년 한일병합의 합법성 논란에 대해 일본은 한일병합은 합법적이었고 식민지 통치를 통해 은혜를 베풀었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데, 이를 식민지배 합법 정당론이라고 한다. 이에 맞서 우리는 일제의 식민통치는 강압적이고 불법적이므로 무효라는 식민지배 불법무효론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일제의 강압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역사가 필요하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불법적이고 강압적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헤이그 특사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고종 황제가 일제의 국권침탈에 온몸으로 저항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헤이그 특사 사건은 당시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실패한 역사였지만,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일제 식민통치가 불법적이고 강압적이었음을 말해주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증거인 것이다.


  덕성학원 재단 건물 해영회관 헤이그 특사 사건 출발지
  이준 열사가 헤이그 밀사로 특파한다는 고종의 밀지를 받은 것은 1907년 4월 20일이다. 헤이그 특사의 비밀문서가 전달되는 당시 상황을 이준의 사위인 유자후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헤이그 밀사로 특파한다는 비밀문서가 전달되는 역사적인 날은 드디어 왔다. 때는 4월 20일(음 3월 9일)이었다. 시종 이종호 씨와 박 상궁이 비밀문서를 받들어 모시고 안국동 이준 선생 자택에 왔다. 이준 선생은 예복을 정제하고 청결한 상 위에 붉은 보자기를 깔고 황제의 은혜에 감읍하면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비밀 조서를 받들었다.”

  이 때문에 덕성학원 재단 건물인 해영회관은 이준 열사가 거주했던 집터일 뿐만 아니라, 헤이그 특사 사건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던 공간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지난 7월 14일 해영회관 앞에 설치한 표석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이준 집터
  李儁家址
  Site of Yi Jun’s House
  이준(1859〜1907)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특사로 파견될 때 살던 집이 있었다. 이준의 아내 이일정(李一貞)이 190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부인상점(婦人商店)을 연 곳이기도 하다.
  2017년 7월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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