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이제 막 여름방학을 마쳤습니다. 방학이 끝난 것은 아쉽지만, 오랜만에 학교 오는 길이 싫지만은 않습니다. 학교는 여전히 조금은 낯설고, 아직 ‘우리 학교’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두어 달만에 만나는 학교와 친구들이 반갑습니다. 한낮은 아직 뜨겁지만, 아침저녁의 선선한 바람은 상쾌합니다.
학교에서의 하루하루는 별 일 없이 흘러갑니다. 하지만 문득 ‘지금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기대보다 재미있는 수업도 있었지만, 대학에서 뭘 배웠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전공과목도 몇 개 들었지만 나하고 맞는지 안 맞는지, 제대로 선택한 건지 아닌지 확신이 없습니다. 친구들과 이런 막연한 불안감을 나누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두 나보다는 행복한 것 같아 나의 남루한 속사정을 늘어놓기가 꺼려지기도 합니다.
사실 그대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어딘가에서 ‘멍 때리며’ 보냅니다. 바삐 오가는 다른 학우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자신만만해 보입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가 ‘좋겠다’,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대는 사실 매 순간 생각합니다. ‘난 어떤 사람이지?’, ‘난 뭘 잘하지?’, 그리고 ‘내 장점은, 매력은 어디에 있지?’... 어떤 때는 ‘정말 내게 그런게 있기는 한 걸까?’ 못난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건 분명히 1980년대에 이십 대였던 제 이야기군요. 주변에선 ‘앞날이 구만리 같다’고, ‘참 좋은 때’라고들 했지만, 저는 ‘지금이 제일 좋을 때면 나중엔 얼마나 더 나빠진다는 거냐’고 불평하곤 했습니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후가 좋았습니다. 삼십 대에는 삶이 막연하지 않아져서 기뻤고, 사십이 돼서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십 대에 이르러서도 대체로 편안합니다. 저는 제가 육십 대도, 칠십 대도, 그리고 건강이 허락된다면 팔십 대도 제 식으로 잘 보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저는 기회만 생기면 제 이십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이후의 평화도 없었을 테지요. 그 때 저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내가 바라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그리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내 생각’ 사이의 괴리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고민들이 결국 제 ‘정체성’에 관련된 것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막연한, 자학에 가까운 시간들이 결국 ‘나다운 나’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서른 살이 넘을 즈음에 마침내 어떤 것이 나다운 것인지, 어떤 일은 나답지 않은지 확신을 갖고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오십 대 중반에 이른 지금도 저는 계속 조금씩 바뀌는 저를 상대하는 데 골몰합니다. 오늘의 나는 지금까지 삶의 총합이자, 제가 바라는 앞으로의 삶의 지향을 반영할 터입니다. 그러니 저는 아마 죽는 날까지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제 자신을 끌어안고 때로 자만하고, 때로 자책하며 씨름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이 저 자신이니만치 아끼고 존중하며 살아보려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덕성인 여러분, 평생을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삼아야 할 스스로에게 더 자주 말 걸어보기를 권합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무엇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냐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냐고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권합니다. 그 친구가 힘들어하는 날엔 어깨를 두드려도 주고, 따뜻한 코코아 한 잔 손에 쥐어주기도 하고, ‘넌 참 멋진 친구야’ 격려도 해주길 권합니다. 덕성은 함께 성장하기 참 좋은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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