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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만의 여성에게 새 생명을, 덕성 개교기념일이 4월 19일인 까닭은?
2018년 04월 16일 (월) 14:53:24 한상권 덕성 100년사 편찬위원장 -

  개교기념일의 의미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Burckhardt:1818∼1897)는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낸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했다. 역사학은 ‘사실(事實: fact)’을 ‘역사적 의미’라는 관점에서 ‘사실(史實: historical fact)’로 재구성하는 학문이 라는 말이다. 결국 과거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실(事實) 중에서 무엇이 사실(史實)이 돼야 하는가를 제대로 구분하는 일이야말로 역사 학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는 셈이다. 각 학교의 개교기념일도 그 학교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史實)로서의 지위를 누릴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事實)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우리대학의 개교기념일이 다가오면 학생들에게 “덕성의 개교기념일이 왜 4월 19일인지 아나요?”라고 물어보곤 한다. 학생들이 학교 설립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정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간혹 “학교가 4.19 탑 근처에 있으니 개교기념일이 4월 19일 아니냐?”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덕성학원 창립일은 1920년 4월 19일로, 1960년에 발발한 4.19혁명보다 무려 40년이나 앞선 일인데도 말이다.

  조선 여성 교육의 발상지, 덕성학원
  스스로 “기미년에 00운동(3.1운동; 필자)이 일어난 뒤로 나는 무슨 충동이 있었던지 가정의 부인들로 한 번 가르쳐 봤으면 하는 생각이 나서 거기에 대한 결심을 하고 다년간 정들었던 배화학교를 사퇴했다”고 회고했던 것처럼, 차미리사(1879∼1955) 선생은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했다. 그는 음력으로 3.1운동이 일어난 한 해가 저물기 전인 섣달 그믐날 조선여자교육회를 발기한 후 ‘일천만의 조선 여성에게 새 생명을 주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내걸고, 양력으로 1920년 4월 19일 종다리(宗橋) 예배당에서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었다. 이는 배화학당 사감 시절부터 운영해 오던 야학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조선에서 처음 보는 토착 여성 교육운동이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적어도 자기의 손으로 편지 한 장을 쓸 줄을 알아야만 하겠고 남이 써 놓은 것을 대강은 알아보아야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타는 마음, 끓는 정성으로 밤이나 낮이나 지식을 원할지라도 아직은 아무도 그들에게 지식을 주지 아니함으로 그들은 이때까지 홀로 답답한 마음을 억제치 못하고 지내오더니 다행히 이번에 조선여자교육회라는 기관이 생기어서 그네들 아낙네의 갑갑한 것을 풀어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한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지난 십십일(십구일의 오기: 필자) 월요일부터 동 회에서는 특별히 가정에 있어 지식을 얻을 기회가 적은 아낙네들을 위하여 종다리 예배당 안에 여자야학회를 열게 되었다.
<출처/동아일보 1920.04.23>

 
  부인야학강습소가 여자야학회를 연 이듬해인 1921년에 들어서면서 ‘안성여자야학교’,‘원산여자야학강습회’ 등 무려 21개의 여성 야학이 우후죽순처럼 창립됐다. 이로 볼 때 ‘여성을 위한 야학’이라는 첫 실험을 한 조선여자교육회 산하의 부인야학강습소는 조선 여성 교육의 발상지가 되는 셈이다. 올해로 창학 98주년을 맞이하는 덕성학원 산하의 우리대학은 ‘조선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여성 교육을 시작한 1920년 4월 19일을 개교기념일로 삼아 기리고 있다.
 
  학생은 시집살이하는 가정부인
  부인야학강습소에 나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집안에 들어앉아 있던 가정부인으로 시집살이에 쪼들리는 이들, 무식하다고 남편에게 구박받는 이들, 남편에게 소박 받은 이들, 일찍이 교육을 받지 못한 설움에 울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시부모나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야간에 외출하는 문제로 남편이나 시부모와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치마를 쓰거나 가마를 타고 배우러 오는 등 놀라운 향학열을 보였다. 부인야학강습소는 설립 당시 학생 수가 10여 명에 불과했으나, 이후 지원자가 꾸준히 몰려들어 한 달 만에 100여 명이 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시에는 가정부인이나 학교에 못 간 사람을 가르칠 만한 교육기관이 없었고, 물론 학교에서도 그들을 입학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1일에 발행된 신문. 교육을 통해 일천만 여성에게 새 생명을 주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밝힌 이 논설은 차미리사 선생이 귀국한 후 언론에 발표한 첫 번째 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출처/동아일보>


  차미리사 선생이 처음 시작한 부인야학은 교육계나 일반 사회의 주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선교사 사회로부터도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한말 이후 한국의 근대교육은 주로 외국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선교사들이 운영하는선교사학교(Mission School)가 대부분이었으며, 일반 사립학교로 남자학교는 설립된 예가있었지만 한국 여성이 설립한 사립학교는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학교를 과연 한국인이, 그것도 여성이 혼자 힘으로 경영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 호기심이 선교사들 사이에 퍼지게 된 것은 당연했다. 선교사들이 내던 초교파 영문 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가 1920년 10월에 차미리사 선생을 단독 인터뷰해 교육사업의 취지와 계획을 자세하게 소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잡지는 부인야학강습소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학교는 지난 봄 개학한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현재는 160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교육의 기회에 여성들의 반응은 굉장히 열성적이어서 학교는 여름에도 쉬지 않고 계속했다. 학생들의 열의와 교사들의 헌신으로 여성들을 위한 야학이란 이 첫 실험은 가장 흥미 있고 유망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성공적인 경험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도 이 같은 학교가 설립할 것을 확신한다.
<출처/'The Korea Mission Field' 중 'The Korean Women's Educational Association' 1920.04>


  부인야학강습소는 종다리교회 종탑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할 수 있는 단계에서 염정동 새문안교회로 옮겨갔다가 청진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근화학원을 거쳐 근화여학교로 성장했다.

  교육목적은 약자를 섬기는 정신
  부인야학강습소는 부인들에게 초등교육을 했으며, 15세에서 50세 사이 여성이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었다. ‘The Korea Mission Field’에는 부인야학강습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문답이 두 건 소개돼 있다. 하나는 교육 대상과 관련된 부분이다.

  문(경기도 학무국): 감옥에 갔던 사람들도 입학시키는가?
  답(차미리사): 우리는 단 두 부류의 여성만 받지 않는데 그들은 첩과 기생이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여성을 돕고자 한다. 당연히 나약하고 과오가 있는 여성들은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며,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것이다. 여자교육회의 목적은 섬기는 데 있다.
<출처/‘The Korea Mission Field’중‘The Korean Women's Educational Association’1920.04>


  차미리사 선생의 답변은 구약성서(이사야61:1-2) ‘주께서 나를 보낸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에게 눈 뜨임을,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다'를 연상케 할 만큼 감동적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여자교육회의 교육목적이 약자를 섬기는 데 있다고 했는데, ‘섬김’은 그의 기본 교육 정신이었다. 차미리사 선생은 조선의 청년들에게 “사람은 섬김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것”이라며 봉사하는 정신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The Korea Mission Field’에 소개된 다른 하나의 문답은 교육 내용과 관련된 부분이다.


  문(경기도 학무국): 조선여성이 어떤 여성들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려 하는가? 미국여성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일본여성 또는 중국여성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가?
  답(차미리사): 특이한 질문이다. 우리는 조선 여성도 미국 여성같이 기독교 교육을 받아 사회적으로 평등한 기회를 갖기를 원한다. 우리는 일본 여성같이 부지런하기를 원하나 그들의 복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원치 않는다. 중국 여성들에게서는 성실함을 배우기를 원한다. 그리고 조선 여성들은 위의 모든 좋은 점에다 우리 고유의 겸손과 순결을 지키기를 원한다.
<출처/‘The Korea Mission Field’ 중 ‘The Korean Women's Educational Association’ 1920.04>


  미국 여성에게서 평등정신을, 일본 여성에게서 근면성을, 중국 여성에게서 성실성을 배워야 하겠지만 조선 여성들은 어디까지나 조선 여성으로 남아야 한다는 게 차미리사 선생의 교육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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