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開)추억①
개(開)추억①
  • 나재연 기자
  • 승인 2018.08.28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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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의 추억을 열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떤 추억으로 차 있는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나겠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모두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시절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어느새 추억이라고 회상하기도 가물가물한 옛날이 됐다. 이에 우리의 어린 날을 채웠던 2000년대 추억의 상징들을 모아봤다. 기억을 가로막는 먼지를 털어내고 어린 날을 담아놓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자.

 

<캡쳐/MBC>

  힐리스
  힐리스는 발뒤꿈치 쪽에 바퀴가 달린 신발이다. 유행의 시작은 가수 세븐이었다. 2003년 세븐은 1집 활동을 할 때 뮤직비디오와 무대에서 힐리스를 타는 모습을 선보였다. 그 후 힐리스는 초등학생들의 워너비 아이템으로 급부상했다. 세븐이 노래를 부르며 힐리스를 신고 자유롭게 무대를 활보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신선함과 충격을 줬다.

   당시 14세였던 김여진(가명. 29) 씨는 “그 당시 세븐의 ‘와줘’가 큰 인기를 끌자, 캡모자를 쓴 채 힐리스를 신고 다니던 학생들이 있었다”며 “그렇게 하고 다니는 남자애에게 네가 세븐이냐고 놀렸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세븐의 무대가 방송되자 바퀴 달린 신발, 이른바 힐리스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어딜 가나 힐리스를 신고 미끄러지듯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17세였던 박준호(가명. 32) 씨는 “매점에 갈 때 힐리스를 신고 갔던 기억이 난다”며 “특히 급식실에 갈 때 힐리스를 신고 가는 건 친구들과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고 말했다. 김여진 씨는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도 힐리스를 신고 뛰다시피 가면 학교에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며 “힐리스를 신다가 일반 신발을 신으면 꼭 바닥이 딱딱하고 끈적끈적한 것 같아 느낌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힐리스는 2016년에 다시 유행하는 듯 했으나, 곧 그 모습을 감췄다. 박준호 씨는 “외국에서는 아직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놀랐다”며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에만 반짝 유행한 게 아쉽지만 그 열풍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가끔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그 시절에 힐리스는 바퀴 달린 신발이라는 제품을 넘어 하나의 현상이었다. 2003년을 바퀴로 뜨겁게 달군 힐리스는 이제 추억이 됐지만, 그 시절 기억은 여전히 달리고 있다. 그 시절 우리에게 힐리스란 ‘신나는 하굣길’이었다.

 

<출처/아시아경제>

  2002년 월드컵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2002년은 그 숫자만 봐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해다. 바로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때문이다. 2002년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4강까지 진출해 4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에 국민들은 우리나라 경기가 있을 때마다 약속한 듯 광장에 모여 다 함께 경기를 관람했다. 국민들은 모두 ‘BE THE REDS’라는 문구가 쓰인 붉은 티셔츠를 입고 응원봉과 태극기를 흔들며 하나가 돼 선수들을 응원했다.

  당시 광화문 인근 초등학교에 다녔던 조정현(가명. 28) 씨(이하 조 씨)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서울광장부터 광화문대로까지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며 “이에 학교가 안전사고를 우려해 학생들을 빨리 집에 보내기 위해 단축 수업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단축 수업으로 학교가 일찍 끝나도 광화문대로가 경기를 보려는 사람으로 가득 차 버스를 타지 못해 먼 길로 돌아가야 했다”며 “그래도 학교를 일찍 마칠 수 있어 마냥 신났었다”고 덧붙였다. 

  월드컵 경기를 광장에서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집에서 경기를 보며 응원하고,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조 씨는 “우리나라 경기가 진행되는 중에 밖으로 나가보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며 “축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그때는 모두가 우리나라 경기를 보며 응원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2002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이 그 당시 우리나라 경기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경기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특별한 기쁨과 추억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조 씨는 “우리나라와 스페인의 8강 경기에서 승부차기가 끝나고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하게 돼 온 가족이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는데, 이웃 주택가에서도 기쁨에 찬 환호성이 들려왔다”며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했다는 사실에 흥분으로 가득 차 태극기를 들고 집을 뛰쳐 나와 집 주변을 마구 달려 다녔다”고 말했다. 이어 “나뿐만 아니라 흥분을 못 이기고 뛰쳐나온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며 “그렇게 모두 똑같이 태극기를 들고 환호성을 지르며 길거리를 뛰어다녔다”고 덧붙였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4위라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냈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얻은 건 단순한 성과가 아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2002년 월드컵이란 ‘기쁨의 축제’였다.


 

  귀여니
  ‘귀여니’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인터넷 소설 1세대 작가다. 인터넷 소설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귀여니의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녀의 필명이 곧 하이틴 소설 작가의 대명사로 꼽히기 때문이다. 귀여니의 대표작으로는 ‘그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 ‘도레미파솔라시도’ 등이 있다. 특히 2001년 발행된 ‘그놈은 멋있었다’는 50만 부가 팔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귀여니의 소설 속 “이강순, 내가 네 별이다!”나 “이 세상에서 바늘구멍 크기 빼고 다, 그만큼 너를 사랑해.” 등의 대사는 지금 들으면 손발을 가만둘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이러한 귀여니의 소설에 깊이 빠져들었다. 등장인물의 이별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악역을 향한 주인공의 통쾌한 복수에 웃기도 했다.

  귀여니의 소설을 읽고 학창시절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꿈꾸던 사람들도 많았다. 어렸을 때 귀여니의 소설을 즐겨 읽었던 김민주(가명. 31) 씨는 “중학생 때 한창 소설을 읽으며 고등학교에 가면 다 예원이(귀여니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 여자 주인공)처럼 사는 줄 알았다”며 “당연한 거지만, 고등학생이 되니 소설 속과 같은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인터넷 소설을 읽는 가장 적합한 시간은 잠자기 전 침대에 누웠을 때라고 한다. 조그만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다 보면 새벽 3, 4시를 넘기는 건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다음날 학교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이 있어도 소설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안수정(가명. 26) 씨는 “그 당시 2G 드폰으로 텍스트 파일을 다운 받아서 여름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흘려가며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며 “지금 생각하면 뭐에 홀린 것 같지만 그때는 현실성 없는 로맨스 소설이 그렇게 재밌었다”고 말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 한 마디에 설레 잠 못 들던 날들이 있었다. 귀여니의 소설을 다시 한 읽어보며 그 시절의 감성을 느끼고, 덤으로 손발이 짜릿해지는 경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시절 우리에게 귀여니란 ‘인생소설’이었다.

 

  버디버디
  ‘㉡r는야곤쥬™’, ‘『T없e맑은i』’, ‘♧천사♧’ 등…. 이는 모두 ‘버디버디’에서 유행하던 닉네임의 예시다. 그 시절 버디버디를 이용했던 은 사람은 이처럼 독특한 닉네임을 갖기 위해 온갖 특수문자를 용하곤 했다. 버디버디는 메신저 프로그램으로 채팅 외에도 게임, 음악방송, 미니홈피 등의 기능을 선보이며 2000년대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지금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카카오톡’을 사용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버디버디를 통해 채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버디버디를 사용했던 정승준(가명. 30) 는 “멀리 이사 간 친구와 소통하기 위해 버디버디를 시작했다”며 이후 주제별, 나이별로 채팅방을 개설할 수 있는 기능을 이용해 모르는 사람과 채팅하는 것이 거워 이를 자주 사용했다”고 말했다.

  버디버디는 단순히 채팅을 위한 메신저를 넘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다양한 수단을 갖고 있었다. 특히 사용자들은 버디버디의 ‘자기상태’ 기능을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표현했다. 자기상태는 버디버디의 프로필에서 사용자의 상태를 표시할 수 있는 다양한 이모티콘을 공하는 기능이다. 기쁨, 슬픔뿐만 아니라 외로움, 설렘, 음악감상, 졸림 등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던 덕분에 많은 사람이 자기상태를 이용해 순식간에 바뀌는 변덕스러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 

  또 버디버디는 직접 전하기 부끄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준필(가명. 25) 는 “버디버디는 내가 원하는 다수에게 같은 내용의 쪽지를 보내는 이른바 ‘전체쪽지’ 기능이 었다”며 “전체쪽지를 보낼 때는 이를 알리는 표시로 앞에 ‘ㅈㅉ)’이라고 표시를 해 보냈다”고 말했다. 이어 “한 친구에게 전체쪽지를 받아 채팅을 이어가다 그 친구와 사귀게 된 경험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게 말을 걸고 싶어 전체쪽지인 것처럼 내게만 쪽지를 보낸 것이었다”며 "이처럼 버디버디의 전체쪽지 기능을 이용해 좋아하는 마음을 아닌 척 표현하는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버디버디를 회상하며 누군가는 자신의 독특한 아이디나 거침없던 행동을 떠올리고 이불을 뻥뻥 차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들은 버디버디를 통해서 솔직하게 자신의 감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버디버디란 ‘감성과 소통의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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