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기자가 들려주는 평양 이야기
서울 기자가 들려주는 평양 이야기
  • 정예은 기자
  • 승인 2018.09.10 16: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이예림 기자

  외진 농어촌에서 태어나 본인의 노력만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이하 김일성대)에 합격했지만, 북한 체제의 모순을 느껴 탈북한 후 한국과 북한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기자가 있다. 바로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이하 주 기자)다. 그는 매달 백 만여 명의 방문자 수를 자랑하는 파워블로그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를 운영하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을 통해 ‘주성하의 서울살이’를 방송하며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저서를 출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기자는 주 기자를 만나 그의 인생과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열악한 환경 속 꾸준한 노력
  주 기자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저는 낙후된 농어촌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그래서 책을 접하기 어려웠고, 책이 있다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읽었죠. 14살 때는 우연히 참석한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이 숨겨놓았던 ‘공산당 선언’을 발견하고 읽기도 했어요.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인데도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다룬 서적이 금서거든요. 그 책은 북한에서 1950년대에 출판된 책이라서 한자가 무척 많았어요. 그래도 훌륭한 책이라니까 무턱대고 열심히 읽었죠. 그 정도로 학창 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고 탈북하기 전까지도 책을 매일 한 권씩은 읽은 것 같아요.”

  그는 열악한 환경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외국어 고등학교에 다니게 됐다. “북한에서 외국어학원에 진학하게 되면 외교관이나 외국어 교원 등 진로가 어느 정도 결정돼 있어요. 진학할 대학도 김일성대 외문학부나 외국어대학, 사범대학 외국어학부 등으로 정해져 있고요. 한국은 자신의 꿈을 좇아 취업할 수 있지만, 북한은 전공에 따라 직업을 정해주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 특별한 꿈은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김일성대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왕복 세 시간 동안 걸어 다니면서 통학하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리고 제가 원하던 대로 김일성대에 합격했죠.”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했다
  주 기자는 대학교 1학년 때 북한 체제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김일성대 철학 수업에서 공산주의를 배웠는데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공산주의의 원칙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적어 분배도 적게 받고 게으른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이들이 분배를 많이 받으면 불공평하지 않냐’고 질문했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공산주의는 사람들의 태만한 정신 상태를 개조해 자신이 가진 능력만큼 일하게 만든다’고 대답해 주셨죠. 하지만 저는 사상 교육을 받아도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어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할 때는 열성적으로 임하지만, 공동체를 위해 일할 때는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인간에게 이기심이 있다는 걸 부정하고 사상 의식을 만들어서 공산주의를 실현한다는 게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주 기자가 북한 체제에 대해 강한 분노를 느끼게 된 건 *고난의 행군 때였다. “방학 때 집에 가려고 기차를 탔는데 기차가 도중에 멈췄어요. 그래서 기차에서 잠깐 내렸는데 **꽃제비 소녀 한 명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예요. 소녀 주변에서 노래를 듣던 군인들이 그 소녀에게 빵을 건네주는 걸 보고 저도 그곳으로 갔어요.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모가 없는 9살 소녀랑 7살 소년이 친남매도 아닌데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어머니가 싸주신 밥을 꽃제비 소녀에게 줬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동생에게 밥을 내밀고 동생이 밥을 더 많이 먹을 수 있도록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일부러 밥을 천천히 먹는 거예요. 그 장면을 보고 북한 체제에 대해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인생 최대의 증오와 분노를 느꼈어요. 그때가 제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었던 거죠.”

  
적응하기 어려웠던 낯선 한국
  주 기자는 여러 번의 고난 끝에 탈북에 성공했다. “김일성대 졸업생은 북한에서 간부로 취급되기 때문에 김일성대 졸업생이 탈북하면 정치범으로 간주해요. 그래서 저는 탈북을 시도했다가 북송돼서 고문도 당하고 방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이 다음 날 아침에 시체가 돼 있는 광경을 보기도 하는 처참한 수감 생활을 경험했어요. 그래도 세 번의 탈북 끝에 중국에 도착해서 한국에 오게 됐죠.”

  주 기자는 한국에 온 직후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처음에 직업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랐어요. 일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에 있는 ‘벼룩시장’을 가져다 봐야 하는데 파는 사람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가져가지 못했는데 3개월 지나니까 앞에 걸어가던 어떤 사람이 벼룩시장을 걸어가면서 쑥 가져가더라고요. 그때 벼룩시장이 공짜로 가져가도 되는 신문이란 걸 알게 됐죠. 그래서 저도 벼룩시장을 가져와서 인력사무소에 전화하고 한국에서의 첫 일로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어요. 8월에 종일 와인 상자를 나르는데 얼마나 더운지 숨을 쉴 수도 없더라고요. 첫 일당으로 4만 5천 원을 받고 인력 알선 수수료와 식비, 버스비를 제외하니까 3만 5천 원을 손에 쥘 수 있었어요. 그 돈을 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기쁘더라고요. ‘아, 내가 이 사회에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싶었거든요.”

  “시간이 지나자 인터넷에 익숙해져서 온라인으로 직업을 찾기 시작했어요. 제 특기가 영어와 중국어인데 한국에서도 외국어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 무역회사 20곳에 지원했어요. 그중 3곳에서만 연락이 왔는데 3곳 모두 제가 탈북자가 맞는지 의심하면서 물어보더군요. 처음에 보수가 높을 것 같아 갔던 회사에서는 담당자가 ‘김일성대 나온 거 맞아요? 김일성대 실력이 우리나라에서 통하겠나?’하고 비웃기도 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 무역회사에 갔는데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 그대로 입사하게 됐죠. 입사하고 나니 대리라고 버젓이 명함도 받았어요. 중국어랑 영어로 된 팩스를 받아 번역하는데 일도 많지 않아 편했고요.”

  그러나 주 기자는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기자로 전향하게 됐다. “무역회사 업무는 편했지만 ‘고향 사람들을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다 언론인이 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 주간지에 지원해 기자로 일하게 됐죠.”

  그가 동아일보에 입사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원래 저에게 동아일보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어요. 동아일보는 그 역사가 긴 데다 항일지여서 북한에서 자주 인용하거든요. 제가 자랄 때 노동신문에서도 한국의 정세를 보도할 때 동아일보를 인용하고, 김일성대에서도 동아일보를 많이 인용하곤 했어요. 또 제가 일했던 주간지의 소장이 동아일보를 자주 읽어서 매일 동아일보에 대해 이야기하니 더 잘 알게 되기도 했고요. 그렇게 주간지 기자로 1년간 일하다 어느 날 저녁에 술을 마시는데 동아일보에서 수습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어요. 그걸 보고 술김에 지원서를 작성했어요. 그리고 탈북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서류 시험과 필기시험, 그리고 후보자 합숙과정을 거쳐 당당하게 공채로 합격했죠.”

  
북한의 실태를 생생하게 고발하다
  북한과 관련된 글을 쓰면서 주 기자는 북한의 실태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사상 교육을 한다고 세뇌되지 않아요. 사람을 복종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게 북한 세뇌 교육의 핵심이에요. 그리고 북한이 사람을 복종적으로 만드는 방법은 사람을 체력적으로 지치는 상황에 몰아넣는 거예요. 북한에서 집단체조를 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10만 명 단위의 사람들이 코피가 터져 나올 때까지 체조를 연습하며 체력을 소모하는데 그 와중에 사상 교육을 진행하면 저항하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게 되거든요. 우리가 보기에 북한과 관련해 이해되지 않는 것들 너머에는 이 같은 정교한 정치적 설계가 있는 거죠.”

  이어 주 기자는 북한의 폐쇄적 사회 분위기에 대해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왜 북한 사람들이 시위하지 않고 독재 정권에 순응하냐고 물어요. 하지만 한국과 북한은 환경 자체가 너무 달라요. 김일성대에 다닐 때 저와 같이 북한 체제에 반감을 품었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우리 인민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며 지방 도시를 순회했다가 국가안전보위부에 고발당해 퇴학 당했어요. 그리고 제게 와서 자신이 이 사회를 너무 몰랐다며, 김일성대 옥상에 올라가서 반체제 내용의 삐라를 뿌리고 분신자살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밤새 그 친구를 말렸어요. 만약 네가 분신자살해도 아무도 삐라를 주워보지 않을 것이고 네 죽음에는 의미가 없을 거라고요.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들어와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추기라도 했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았고, 지금까지 수용소에 끌려가 죽은 사람만 100만 명이 넘어요. 독재 정권이 한국을 장악할 때조차 한국에는 언론이 있었고, 야당과 야당 지도자가 있었고, 최소한 사람들도 시위할 수는 있었잖아요. 하지만 북한에서는 연좌제로 인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팔촌까지 죽어 나가니 도저히 어떤 행위도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아 모든 게 불가능해요. 삐라를 주워볼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나라와 그 자유가 있는 나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요. 그걸 한국 사람들 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사명을 갖고 전하는 목소리
  주 기자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블로그에 글을 쓰고 대북 방송에 참여하거나 개인 저서를 집필하는 등 각종 북한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그가 이토록 바쁘게 사는 이유는 북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서다. “저는 북한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요. 물론 한국에서 활동하니까 북한의 입장이 아닌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면 편하겠죠. 하지만 저에게는 북한에 대한 사명이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북한에 두고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혼자 잘 먹고 잘살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글을 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북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8
  • 청소년보호책임자 : 나재연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한상권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나재연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