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덕성여대가 쌍문동으로 옮겨진 이유는?
[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덕성여대가 쌍문동으로 옮겨진 이유는?
  • 은정태(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 승인 2018.09.1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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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대학은 1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존립했다. 그만큼 덕성의 역사는 가치 있다. 모든 역사는 현재로 통한다. 앞으로 나아갈 덕성의 미래를 위해 덕성의 100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덕성여대는 1979년 쌍문동 캠퍼스로 이전했다. 당시 △약학과 △제약학과 △가정학과 △식품영양학과 자연계열 4개 학과의 2~4학년을 옮긴 것을 시작으로, 1984년에 이르러 야간강좌를 제외하고 대학본부 및 전체 학과가 쌍문동 캠퍼스로 이전했다. 거의 5년이 소요된 셈이다. 쌍문동 캠퍼스 조성이 시작 된 것은 1973년이었다. 곧 가정학관, 약학관, 예술관, 중앙도서관, 행정동 건립에 이어 학생회관이 신축돼 종합대학의 기본골격이 갖추어진 것이 1991년이었음을 생각하면 거의 20년이 걸렸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 사이 덕성여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덕성여대의 발전사를 보면 운니동 캠퍼스에서 쌍문동 캠퍼스로의 이전이 획기적 계기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70~80년대에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이 추구됐기 때문에 서울 소재의 다수 학교가 경기도 남부에 그 분교를 두어 운영 하고 있는데 비해 덕성여대는 특이하게도 같은 서울 안에 별 도의 캠퍼스를 두고 있다. 덕성여대는 왜 쌍문동으로 이전하게 됐을까?


 

1967년 덕성여대 쌍문동 캠퍼스의 항공사진이다. 차미리사 묘소와 이전한 감고당이 보인다.<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1974년 덕성여대 쌍문동 캠퍼스의 항공사진이다. 대운동장과 정구장이 조성됐다.<출처 / 서울시>
1979년 덕성여대 쌍문동 캠퍼스의 항공사진이다. 가정관과 약학관이 건축돼 있다.<출처 / 서울시>
1985년 덕성여대 쌍문동 캠퍼스의 항공사진이다. 미술관과 도서관이 보인다.<출처 / 서울시>


  쌍문동과의 시작은? 
  덕성여대가 쌍문동과 관계하게 된 것은 1932년 덕성학원 3대 박준섭, 4대 송금선 이사장이 쌍문동 532번지 일대 밭 6,700여평을 매입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에 이곳은 별장으로 이용됐으나, 1955년 차미리사 초대 이사장이 사망하자 별장 위 산지에 묘지가 마련되고 이곳이 덕성학원 소유 재산이 됐 다. 또한 몇 년 뒤에는 덕성여자고등학교에 있던 감고당을 묘소 아래로 이전 건축했으며, 1957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는 상계동에 12만 평을 필두로 모두 17만 평을 매입했다. 차미리사의 묘지 마련 후인 1958년부터 덕성학원은 묘지의 산줄기 전면에 있던 토지를 하나씩 매입했다. 그 흐름은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고, 1973년 쌍문동 부지를 개발할 때는 현재 덕성여대 공간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면적인 68,000평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처럼 덕성여대가 쌍문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전임 이사장의 토지 매입, 차미리사 묘소 선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덕성여대가 위치한 곳이 쌍문동은 아니었다.

  덕성여대는 왜 쌍문동으로? 
  처음부터 덕성학원이 덕성여대를 쌍문동으로 이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쌍문동 토지와 상계동 토지를 덕성여자대학교와 덕성 중·고등학교 이전 대상지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 모든 게 불분명했다. 도심의 학교를 외곽으로 이전하겠다는 생각의 배경에는 운니동 교사의 협소함이 있었다. 보다 직접적 인계기는 1955년 8월 ‘대학설치기준령’ 공포 이래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서 추진한 ‘대학정비’ 정책이었다. 당시 대학 난립과 대학생의 증가로 대학 부실을 지적하는 목소리에 문교부는 대학과 대학생을 줄이자는 ‘대학정비’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에 따라 ‘대학설치기준령’에 부적합한 학교는 학과폐지, 정원감축을 해야 했고, 이러한 정책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도 이어졌다. 각 대학은 대학정비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인당 도서권수가 학생 1인당 30권으로 규정되며 대학에서 책을 모으려 들어 청계천 일대 헌책방의 책이 동이 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덕성여대는 영문학과, 음악과, 가정학과를 폐지했고 정원감축의 피해를 입었으며 잠시지만 덕성여대의 주간대학이 없어지고 야간대학만 남기도 했다.

  종합대학건설기본계획안 
  1972년, 쌍문동 이전 구상이 처음으로 정리·발표됐다. 1972년 계획은 1970년 박원국(후일 5대 이사장) 부학장이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등장한 학교발전계획이었다. 교외지역에 학원도시를 형성해 대학과 중·고등학교를 이전한다는 박정희 정부의 ‘수도권인구 과밀집중억제에 대한 기본방침’(1970년) 에도 부응하는 결정이었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쌍문동에 우선 종합운동장과 정구장 등을 설치하고 1974년부터는 중·고 등학교 교사를, 1981년에는 대학교 캠퍼스를 신축하려 했다. 또한 상계동에는 대학부설연구기관과 실습장, 약초원, 임업시 험장, 원예학교, 농업고등학교, 농과대학, 공과대학, 공업고등 학교, 종합레크리에이션센터 등을 두려 했다. 이를 당시 ‘쌍문 동캠퍼스계획도’와 ‘종합대학건설기본계획안’이라 불렀다. 이처럼 현 덕성여자대학교 자리에는 당시까지도 중·고등학교가 주로 고려됐고, 대학교 이전에 대한 구상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계동에 대학관련 기관을 두겠다는 구상이 훨씬 진전됐었다.

  덕성학원은 1973년 8월 서울시로부터 학교시설로 승인을 받았다. 이어 ‘덕성여자대학교는 밀집된 주택과 상가 등이 근접돼 있는 종로구 운니동에 소재해 있어 도심지공해를 피해 도봉구 쌍문동에 이전 신축한다’고 이전 배경을 서울시에 제출했다. 이가 승인된 후 곧바로 정구장과 종합운동장을 건설 했고, 종합운동장에서 운니동 학생들의 첫 체육수업이 1974년 1학기에 시작됐다.

  쌍문동 부지에 체육시설에 가장 먼저 자리 잡게 된 것은 ‘대학시설정비령’의 체육장 규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체육장 조차도 운니동 본교와의 이동거리 때문에 문교부는 계속해서 그 개선을 요구했다. 이러한 이유에라도 운니동 캠퍼스의 이전은 불가피했다. 


  덕성여자대학장기발전계획 
  1973년 대학발전계획위원회가 구성돼 2년 뒤에는 11개 단과대를 둔 종합대학 구상인 ‘덕성여자대학장기발전계획’이 만들 어졌다. 1997년부터 남녀공학의 종합대학을 구상하며 7천 명의 학생정원(쌍문동 5천 명, 상계동 1천 명, 운니동 1천 명)을 전망했다. 쌍문동에는 △인문 △약학 △예체능 계열과 행정기구 및 도서관 박물관이, 상계동에는 △자연 △공학 △농학 계열를 두며, 운니동에는 의학, 간호대를 두겠다는 것이었다. 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둔다고도 했다. 이 외에도 각 시설물 건축일정, 교수 수, 장서 수의 확충을 구상했다.

  1975년 계획은 3년 전의 계획보다는 훨씬 진전돼 있었다. 위 아카데믹플랜을 바탕에 두고 캠퍼스 배치 계획을 작성했다. 당시 서울대 관악캠퍼스 마스터플랜을 짰던 제임스 패덕 이 참여해 약학관, 가정관, 미술관, 박물관, 학생회관, 도서관, 체육관, 운동장, 강당, 기숙사, 본부 등을 배치했다. 건물높이를 3~4층으로 제한하고, 한 개의 건물 안에 중정(中庭)을 두 어 휴식공간을 뒀으며 감고당 산 밑에 기숙사를 뒀다.


 

덕성여대 장기발전계획 마스터플랜<출처 / 덕성여대신문>

  이 계획에 따라 배치된 학교 건축물은 현재 덕성여대의 캠퍼스와 거의 동일하다. 가장 이르게 건축한 약학관과 가정학관은 1977년 기공해 이듬해에 완공했다. 1984년, 덕성여대가 쌍문동 캠퍼스로 완전 이전하고 3년 뒤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것은 당초 구상한 계획보다 이른 시기였다. 물론 이가 이르게 달성된 건 학교측의 의지와 별도로 5공화국의 졸업정원제 정책이 그 배경에 있었다.

  1973년을 기점으로 잡으면 덕성이 쌍문동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올해로 45년째다. 지금 덕성은 쌍문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학교에 머무는 것을 넘어서 쌍문동을 더 알고 더 깊이 들어가 보자. 곧 지역과 대학의 만남이 될 것이다. 최근 덕성여대의 위기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운니동 캠퍼스에서 쌍문동 캠퍼스로의 이전 과정에 장기적인 구상과 세밀한 준비, 꾸준한 추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다 주체적인 참여와 치열한 토론이 뒤따른다면 덕성여대의 위기는 곧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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