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묻어나는 이야기(방학)
삶이 묻어나는 이야기(방학)
  • 덕성여대 기자
  • 승인 2004.08.2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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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학교 시절 나는 여름방학만 하면 항상 우리오빠와 10명 남짓한 외사촌들과 함께 전라도 고창에 있는 외갓집으로 향했다. 이모부의 봉고차에 실려 몇 시간씩 달려야 할 정도로 먼 길이었지만 신나게 사촌들과 떠들다보면 어느새 외갓집 대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자란 나는 여름마다 맛보는 시골생활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당시 외갓집에는 항아리를 묻어 놓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볼일을 보는 재래식 화장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아침마다 닭들이 낳은 시선한 달걀을 날로 먹는 기회를 맛보았다. 외갓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어서 우리는 날마다 바다에 달려가서 신나게 물장구를 쳤다. 바다의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면 우리는 외삼촌의 경운기를 타고 갯벌에 가서 조개를 잡았고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께서는 야채와 조개를 듬뿍 넣고 조개 부침개를 해주셨는데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뵐 수 없지만 항상 인자하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번은 외갓집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이모댁에서 놀다가 외갓집으로 돌아올 버스를 놓쳐 모두 함께 외갓집으로 걸어왔던 적이 있다. 그때 이모는 외갓집에 가서 먹으라며 직접 키우신 옥수수와 토마토를 한아름 주셨다. 그것을 나이가 가장 많았던 사촌오빠가 배낭에 짊어지고 우리는 사이좋게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모댁에서 외갓집을 가려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던 빈 창고를 지나야만 했는데 그곳을 지나가가 배낭을 짊어졌던 사촌오빠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누가 가방을 잡아당긴다면서 이건 분명히 귀신이라고 우리들에게 겁을 주었다. 물론 우리를 놀리려는 사촌오빠의 장난이었지만 그걸 알리 없던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우리오빠의 손을 잡고 힘껏 뛰다가 넘어진 나는 무릎에 피가 흐르는 것을 알고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고 결국 사촌오빠는 배낭 대신 나를 업고 그 먼 길을 걸어야했다.

 그때 나이가 가장 어렸던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다른 사촌들도 성인이 되어 직장에 다니거나 가정을 꾸렸다. 이제는 모두의 생활이 바빠 그때처럼 자주 만날 수 는 없지만 어쩌다가 만날 때면 아직도 어린시절 여름방학의 추억은 우리들의 공공연한 화제가 되곤 한다. 아직도 방학 때만 되면 아련히 떠오르던 외갓집에서의 추억은 나의 가슴속에서 소중하게 영원히 간직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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