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과 기록문화

과거 기록들을 톺아보며 기록문화를 탐구하다

2025-04-07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왕조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이지만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이에 과거 기록물의 역사를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과정과 보관 방식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사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

  한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했다. 완본의 분량이 1,707권 1,187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서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법률 △사상 △생활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한 왕조의 실록이 이처럼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보관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 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실록은 왕의 사후에 전 왕대의 실록이 편찬되는 방식을 취했다. 왕 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실록청에는 영의정 이하 주 요 관리들이 수찬관, 편수관, 기사관 등의 직책을 맡아 실록 편찬을 공정하게 집행했다. 실록청에서는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와 시정기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실록 편찬에 착수했다. 시정기는 서울과 지 방의 각 관청에서 시행한 업무들을 문서로 보고 받아 춘추관에서 그 중 중요사항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관상감일기> △<춘추관일 기> △<의정부등록> △<승정원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정기는 매년 책으로 편집해 왕에게 보고했으며, 보관된 시정기를 실록의 주요 자료로 활용했다.

  실록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사관이라 칭했다. 좁은 의미 의 사관은 ‘한림’이라 칭했으며 예문관의 전임관원인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으로 구성돼 있다. 한림 8인은 사관이 돼 △입시 △숙 직 △사초의 작성 △시정기의 작성 △실록 편찬 △실록 보관을 위한 *포쇄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한림 8인은 청화한 벼슬로서 청렴하면 서도 글을 잘쓰는 사람이 임명됐는데, 사관을 선임하는 법은 엄격하 게 적용했다. 사관들은 조회, 조참, 경연, 사냥 등 왕이 참여하는 행 사뿐만 아니라 주요 회의에 참석해 그 내용을 기록한 사초를 작성했다. 사초는 사관이 직접 보고들은 내용과 자신이 판단한 논평까지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당대 사관들의 역사의식 까지 담겼다. 왕조차도 사초를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해 사관의 신변을 보장했고, 자료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사초는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와 이를 교정하고 정리한 중 초,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의 세 단계 수정작업을 거쳐 완성했다. 초초와 중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으며, 물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했다. 이 작업을 세초라 했으며, 사초를 주로 세 척한 장소는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차일암이라 불린 널찍한 바 위에 씻은 종이를 말렸으며, 말린 종이는 조지서에서 새로운 종이로 만들었다. 세초를 마치면 이를 축하하는 행사인 세초연을 베풀었고, 공이 있는 자들을 시상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실록이
  산으로 간 까닭은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을 행한 후에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1부씩 보관했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전주,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보관했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의 위험이 제기 됐으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에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됐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조선의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됐다. 서울의 춘추관 사고를 비롯해 강화도의 마니산 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사고로서, 지역별 안배 후에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인조때 묘향산 사고는 이후 청나라인 후금의 침입을 대비해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이전했다.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과 화재 등으로 크게 파손이 되자, 1660년(현종 1)에 인근에 정족산 사고를 짓고 이 곳에 실록을 옮겨 보관했다. 조선 후기 4곳의 지방 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운영됐고, 사고 주변에는 수호사찰을 배치해 사고를 지키게 했다. 전등사(정족산 사고), 안국사(적상산 사고), 각화사(태백산 사고), 월정사(오대산 사고)가 수호사찰의 기능을 했다.

 

  실록의
  철저한 관리와 점검

  실록 자체로도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접할 수 있지만,

  실록 편찬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정리한 ‘실록청의궤’도 다수 남아 있 어당시인들의기록정신을알수있다.또한실록의꾸준한관리 를 위해 ‘실록형지안’(實錄形止案)’을 작성했다. ‘실록형지안’은 실록 의 봉안이나 포쇄, 실록의 **고출, 실록각의 보수 등의 사유로 사고를 열어야 할 때 그 사유와 함께 당시에 보관됐던 서책의 상황을 기록한 일종의 ‘장서 점검 기록부’에 해당하는 서류철이다. ‘실록형지 안’에는 사고를 연 시기, 각 사고와 궤짝별로 보관된 서책의 종류와 수량을 비롯해 파견된 사관과 실무자들의 명단 등을 기록하고 있다. 사고의 문은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이 아니면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했다.

  그만큼 사고의 실록들을 철저하게 보관하고 관리했던 것이다. 실록에 대한 엄격한 관리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 정기적인 포쇄작 업이다. 포쇄는 책을 바람에 말려 습기를 제거해 부식 및 충해를  방지시킴으로써 서적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세종대 이후에는 춘추관문서를 3년에 한번씩 포쇄를 행할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500여 책의 ‘실록형지안’이 보관돼 있으며 실록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거풍을 시킨 기록 인포쇄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다.

 

  당쟁의 격화와
  수정본 실록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수정 과정을 거친 실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크게 네 번이 되는데 왜 수정본 실록이 존재했던 것일까?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경 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 독립된 수정실록의 모습을 갖추진 못했 지만 <숙종실록>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는 형식으로 <숙종실록>의 말 미에 첨부한 <숙종실록보궐정오>가 있다. 수정본 실록이 존재할 수밖 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조선중기 이후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됐기 때문이다.

  실록은 전임 왕에 관한 기록이므로 후대 왕 시절 집권세력에 의해 편찬됐다. 그런데 붕당정치가 가속화되면서 정파간의 권력 교체가 발생하고 새로 권력을 잡은 당파는 반대파들이 작성한 실록이 못마 땅했다. 이것이 수정본 실록의 편찬 배경이다. 최초의 수정본 실록의 편찬 작업은 인조대에 이뤄졌다. 인조는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 의 성공으로 즉위한 왕으로서 인조대의 집권세력은 서인이었다. 그 후, 서인들이 타도한 광해군대의 집권세력인 북인들이 편찬한 <선 조실록>은 서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불만스러웠다. 인조 즉위 후 경연에서 서인들이 중심이 돼 <선조실록>과 광해군대의 시정기를 수 정하자고 제의했던 것은 이러한 인식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실록을 없애고 새로 실록을 쓴다는 것은 전례도 없거니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의한 편찬이라는 비난을 살 것이 분 명했다. 이에 기존의 <선조실록>은 그대로 두고 <선조실록>의 내용 을 수정하고 보완한 형태의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어 두 가지 형태의 실록을 후대에 그대로 보존하게 했다. 한 왕대에 두 종류의 실록이 존재한 것에서 당쟁의 격화라는시대적상황과 함께, 반대정파에 의해 작성된 기록까지 없애지 않아 그 평가는 후대인들의 몫으로 남겨뒀던 점은 현재에도 많은 시사점이 있다.

 

  * 포쇄(暴灑) : 실록을 바람에 말리는 일, 대개 3년에 한번씩 함

  ** 고출(考出) : 전거가 필요할 때 뽑아서 열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