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용과 수용의 경계에 선 외래어
언어 정체성 위협하는 외래어 남용, 올바른 기준 확립해야
외래어는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러나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은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언어 이해에 취약한 계층을 소외시키는 문제를 초래한다. 그렇지만 글로벌 시대에서 외래어의 필요성이 강조되기에 남용과 수용의 경계에 선 외래어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소통을 막는
외래어 남용
우린 일상생활 속에서 외래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방송가에서의 외래어 사용은 확연히 두드러진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2024년에 실시한 ‘지상파 TV 프로그램의 제목 사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EBS △KBS 1·2 △MBC △SBS 총 5개 채널의 315개 프로그램 중 외국어 제목의 프로그램은 65편으로 20.6%의 수치를 기록했다. 이중 어린이 프로그램은 35.7%나 불필요한 외국어 제목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공영방송인 KBS 2TV는 불필요한 영어·외래어를 제목에 사용하는 비율이 26.9%로 가장 높았다. 이런 방송에서의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은 사람들의 피로감을 유발하기 쉽다. 상명대 국어문화원이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중매체 속 외국어·외래어 표현으로 인한 스트레스 경험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간혹 있다’고 답한 사람이 전체의 65%를 기록했고 ‘매우 많다’고 답한 사람이 17%였다.
외래어 사용을 최대한 지양해야 하는 공공기관에서도 외래어 사용이 흔히 관찰된다. 국립국어원의 ‘2023년 공공기관 공공언어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분야에서 접하는 외래어 비율은 해마다 증가했다. △기사 △방송 △공공기관 보도자료 등에서 외국어·외래어를 자주 접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77.9%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 대비 41.3%p 상승한 수치로 공공분야에서 외래어 사용이 더욱 만연해졌음을 보여준다. 국어기본법 제14조에 따르면 공문서 등 공공기관의 공공언어는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 규범에 맞춰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 공공기관의 외래어 남용은 국가와 국민 간 소통의 장벽을 형성한다. 국립국어원이 2020년 실시한 국민 언어 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5,000명 중 22.9%가 공공기관의 서류 및 안내문 속 언어 수준이 ‘쉽지 않은 편’이라고 답했다.
외래어 남용이 낳은
사회적 소외계층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과 디지털 기기의 보급화로 인해 세대간 정보의 격차도 커지고 있다. 외래어 사용에 취약한 고령층의 경우 외래어 사용을 기피하고 어려운 외래어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글문화연대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70세 이상 고령층이 이해한 외래어는 3,500개 단어 중 256개에 불과했다. 이는 고령층의 정보 접근성을 떨어뜨리고 디지털 소외 문제로 이어진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체제가 일상화되며 무인 자동화 기기(키오스크)가 보급됐다. 고령층의 경우 디지털 기기에 익숙지 않기에 주문을 위한 사용부터 어렵다. 더해 대부분 외래어·외국어로 표기돼 있어 고령층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실정이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조사한 131개의 무인 자동화 기기 중 외래어·외국어가 포함된 기기는 40%에 달했다.
특정 계층의 소외는 세대 간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전문가 집단의 외래어 남용으로 인한 계층적 소외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특정 지식이나 서비스 접근성을 제한해 저소득층·저학력층의 소외 문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코로나19 시기 등장한 △팬데믹 △언택트 △코로나 블루와 같은 신조어는 정보 습득에 취약한 중장년층과 저학력층의 정보 소외를 더욱 키웠다. 국민의 건강 및 질병과 관련된 사안인 만큼 이런 용어는 우리말로 대체해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외래어 순화를
위한 움직임
외래어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는 다양한 방안을 펼치고 있다. 공공기관에선 문서와 보도자료를 이해하기 쉬운 말로 만들기 위해 ‘국어책임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어책임관 제도란 공공기관에서 사용되는 문서나 보도자료를 쉽고 명확한 우리말로 작성하도록 점검하고 개선하는 제도다. 현재 모든 국가기관과 지자체로 확대돼 공공언어 전체를 점검하는 체계로 자리 잡았다. 각 기관은 매년 국어 책임관의 활동을 점검해 공공언어가 지나치게 어렵지 않은지 살핀다. 이는 외래어와 전문용어 사용을 줄여 국민이 정보 접근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종로구는 언어 환경을 정비하기 위해 ‘종로구 한글사랑 조례’를 제정해 공공언어와 생활언어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각종 문서뿐만 아니라 옥외광고물에도 한글 표기를 원칙으로 하도록 규정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 환경을 조성하겠단 취지를 담고 있다. 특히 간판의 경우 외국어나 한자가 필요할 때에도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한글을 함께 기록하도록 명시해 지역 내 상업 공간 전반에서 한글 사용을 자연스럽게 확산시키는 기반이 되고 있다.
이는 실제 거리 정책으로도 연계됐다. 종로구는 간판 정비 사업을 통해 오래되거나 혼잡한 간판을 정돈하고 지역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한글 중심 간판을 확산하도록 지원했다. △인사동 △북촌 △낙원도와 같이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은 정비 이후 한글 표기가 늘면서 전통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더해 종로구청은 간판 교체 비용의 일부를 지원해 상인들이 한글 간판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단순한 미관 개선을 넘어 지역 언어 환경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는 정책적 의지를 보여주며 공공언어 정책을 실천하고 있다.
공존과 배제 사이
타협점 찾아야
이런 외래어 순화 노력엔 여전히 현실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이미 우리 언어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아 현실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외래어가 있다. 예를 들어 △버스 △컴퓨터 △서비스와 같은 외래어는 마치 고유어처럼 사용된다. 이와 같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우며 공개적으로 사용되는 외래어의 경우 무조건 순화하기보단 수용 여부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방송에선 외래어 사용과 관련해 시청자의 이해를 돕고 올바른 국어사용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올바른 방송언어 사용을 위한 ‘방송언어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방송 제작 현장에서 이를 준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방송언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외래어 사용을 원칙적으로 지양하고 있으며 우리말 대체어가 없거나 일상에서 널리 쓰여 의미 전달에 무리가 없는 외국어 사용은 허용하고 있다.
또한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법률 분야에선 법제처를 중심으로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일본식 한자어 △지나친 축약어 △외국어 순화를 통해 법률 접근성을 높이고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해태하다’를 ‘게을리하다’로 바꾸며 난해했던 법률 용어를 정비했다.
그러나 외래어의 유입이 단순히 우리말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외래어의 유입은 한국 문화의 확장 기회를 제공하며 고유어와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핵인싸’와 같이 외래어와 고유어가 결합된 신조어는 우리말과 외래어를 결합해 표현 영역을 확장한다. 글로벌 시대에 외래어는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낮추며 문화 교류에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적절한 외래어 차용은 효율적인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외래어 유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유입이 무분별하게 확대될 경우 또 다른 소외를 초래할 수 있다. 외래어 사용이 우리말의 표현 기반을 약화시키고 이해의 격차를 낳는다면 지양해야 한다. 이에 외래어는 필요한 범위에서 수용하되 남용을 경계하며 균형 있는 사용 원칙을 지향해야 한다. 따라서 우린 외래어의 남용과 수용의 경계에서 우리말의 고유성을 유지하며 공존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길을 모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