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그 피부 안쪽의 혁명
인류학을 연구하는 나에게 ‘시간’은 압도적으로 중요한 주제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만나는 여러분에게 시간은 연구 주제라기보다 당장 처리해야 할 과제이거나 쫓기는 마감 혹은 막연한 불안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우린 흔히 시간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다고 배운다. 하지만 인류학자의 눈으로 본 시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우리 사회엔 ‘사회적 시차’가 존재한다. 누군가는 야간노동을 하며 생체 리듬을 거스르고 빈자는 수면을 박탈당하며 시간을 착취당한다. 이 절대적 시간 빈곤과 시간 불평등은 단순히 바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몸에 새겨지는 사회적 폭력이다.
특히 청년인 여러분의 시간은 ‘기다림의 정치학’이란 거대한 권력 기술에 포획돼 있다. 사회는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기다려라’ ‘아직 때가 아니다’ ‘취업할 때까지만 참아라’라고 말한다. 위로를 가장한 명령들은 사실 시간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통치의 기술이다. 너희는 아직 미완의 존재이니 현재를 유예하고 미래를 위해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훈육. 이것이야말로 청년의 가장 소중한 지금에 대한 식민지화다.
이 기다림의 강요 속에서 여러분의 시간은 ‘접힌 시간성’이 된다. 불확실한미래의 보상을 위해 현재의 욕구와 감각을 접어버리는 것이다. 현실은 미래에 압류당하고 ‘라떼는 말이야’라는 과거의 유령들이 현재의 여러분을 붙잡는다. 과거의 훈계와 미래의 불안 사이에서, 정작 살아 숨 쉬어야 할 청년의 오늘은 질식되고 삭제된다.
기다림을 강요받는 동안 내가 나에게 머물 시간은 사라지고 나와의 괴리는 깊어진다. 몸이 요구하는 생체 시간과 사회가 강요하는 인내의 시간 사이에서 우리는 분열된다. 이 괴리가 커질수록 우리는 내 존재의 자각을 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난 인류학자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회가 주입한 시간의 개념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라. 시간은 소유물이 아니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무작정 기다려야하는 대상도 아니다. 시간이 아닌 ‘경험’이 진실이다. 사회가 기다리라고 명령할 때 여러분은 지금 내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내 피부에 닿는 공기가 어떤지, 내 뱃속에서 어떤 감정이 꿈틀대는지를 목도해야 한다.
진정한 시간의 주인은 시간을 관리하는 자가 아니라 사회적 시차와 기다림의 강요를 거부하고 자신의 감각을 되찾는자다. 진짜 시간은 지금 쉬고 있는 숨이며 그 숨의 흔적에 대한 기억이고 그 기억이 엮어낸 기대일 뿐이다. 시간은 여러분의 밖에 있는 거대한 권력이 아니다. 시간은 지금 여러분의 피부 안쪽에서, 얼굴의 근육에서 그리고 뱃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명력 그 자체다. 강의실을 나서는 여러분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에 주눅 드는 대신 자신의 뱃속에서 넘치도록 꿈틀거리는 그 시간을, 그 생생한 경험을 믿고 당당히 걸어가기를 바란다. 시간표는 그 이후에 오롯이 여러분의 수단으로 굴복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