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사회, 스텔스 페미니즘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대중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성 의제를 공공연하게 언급하기 꺼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이러한 논의에 참여하길 주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을 맞아 스텔스 페미니즘과 우리사회 속 여성대학의 역할을 알아보고자 한다.
목소리를 숨긴
조용한 지지
스텔스 페미니즘은 외부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일상 속에선 조용히 페미니즘을 지지하거나 실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적군의 탐지를 피하도록 설계된 군사 기술 ‘스텔스’에서 차용한 단어로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데브라 미컬스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3년 발행한 에세이 <Stealth Feminists: The Thirtysomething Revolution(스텔스 페미니스트: 30대의 혁명)>을 통해 여성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명시하지 않아 일상에서 성평등을 실천하는 모습을 주목했다. SNS에서 계정이나 공개 범위를 나눠 페미니즘 관련 콘텐츠를 소비하고 공유하는 경우와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만 일상생활에선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히지 않는 행동 또한 스텔스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스텔스 페미니즘은 흔히 급진적 여성주의로 불리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확연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직접적인 방식인 △시위 △교육 △문화 투쟁 등을 통해 여성에게 가해졌던 억압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스텔스 페미니즘과 차이가 있다. 우리대학 차미리사교양대학 김주희 교수(이하 김 교수)는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남성 중심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정신을 보이며 살아왔다”며 “스텔스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여전히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차별에 대응하고 있단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유
우리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여전히 쉽게 공론화하기 어려운 주제다.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는 과거 SNS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일부 게임 이용자들이 문제 제기를 한 이후 논란이 일자 게임 개발사인 ‘프로젝트 문’은 해당 일러스트레이터와 계약을 해지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생각을 밝히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으로 느낀다고 나타났다. 2030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성신문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9.8%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중 46.8%는 “젠더 평등엔 동의하지만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건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을 때 돌아오는 다양한 불이익은 흔히 ‘백래시’의 결과로 나타난다. 백래시는 기득권 집단이 사회정치적 변화로 자신의 영향력이나 권력의 감소를 우려해 반발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다. 미국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의 책 <백래시>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을 다루는 단어로 처음 사용됐다. 백래시는 우리사회에서도 여러 사건을 통해 나타났다. 2018년 6월 서울시장 선거에서 페미니스트라고 언급한 신지예 녹색당 후보의 선거 벽보와 현수막이 27곳에서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남녀공학 대학 내 여성들로 이뤄진 대학가 총여학생회는 학생 사회의 논쟁 속에 잇따라 폐지됐다. 2019년 1월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폐지를 마지막으로 서울권 대학의 총여학생회는 모두 사라졌다.
이러한 백래시 현상엔 페미니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있다. 일각에선 페미니즘 전체를 극단적 개념으로 인식해 거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경향신문과 언더스코어가 진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페미니즘 지지에 동의한다고 응답한 남성은 5.5%에 불과했지만 여성은 40.3%로 7배 이상 차이를 보였다.
2015년 한국 사회에 등장한 ‘미러링’ 전략 역시 백래시를 심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미러링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이 받은 피해를 같은 의미로 돌려준다는 의미다. 이는 기존에 여성에게 사용되던 여성 혐오 표현을 모방해 남성에게 적용하는 전략을 말한다. 이런 방식은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됐고 이후 대중들이 페미니즘 전체를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젠더 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또한 백래시를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최근 선거에선 젠더 갈등을 정치적으로 수용하며 지지층 결집을 위한 선거 전략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기업이나 정치인이 백래시 주장을 정당한 요구처럼 승인하거나 정치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을 심화시키는 배경으로 작동할 수 있으므로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사회의 저조한
성평등 인식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인식은 우리사회의 저조한 성평등 의식에 기인한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25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젠더 평등 달성 지수는 0.687로 전체 148개국 중 101위를 기록했다. 성별에 따라 차별을 느끼는 비율도 극명하게 대비됐다. 경향신문과 언더스코어의 설문조사 결과 여성 차별이 존재한다고 응답한 여성은 69.6%인 것에 비해 남성의 경우 12.4%에 불과했다. 한국 사회에서 성차별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충분히 공유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책 <백래시 정치>에선 한국의 극심한 젠더 갈등의 원인으로 불안정한 경제 체제와 노동 시장을 지적한다. 청년 남성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현세대의 청년 여성 또한 공유하는 감정이다. 다만 남성이 과거 세대와 비교해 특권의 상실이라는 박탈감을 느끼는 반면 여성은 잃어버릴 특권 자체가 없단 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라고 분석했다.
성평등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페미니즘을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닌 보편적 권리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성평등 지수가 높은 해외 국가의 경우 성평등 정책이 제도적으로 잘 구비돼 있고 여성 권리 확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역시 넓게 형성돼 있다. Pew Research Center에서 진행한 ‘News best countries 2020 report’에 따르면 성평등 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은 국가인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에선 응답자의 약 95%가 “여성은 남성과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답했다. 또한 △스웨덴 △멕시코 △캐나다 △독일 등은 ‘페미니스트 외교’를 내세우며 여성 인권과 젠더 평등을 외교·개발 정책의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
여성대학이 여는
공론의 장
여성의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스텔스 페미니즘은 현실적인 대응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서울여자대학교 교양대학 민가영 교수는 “페미니즘은 대중화를 거치며 특정 집단만의 정치적 지향점을 넘어섰다고 생각한다”며 “최근의 페미니즘이 가부장제 자체를 낙후된 것으로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피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론 스텔스 페미니즘이 여성 의제의 공론화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단 한계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여성대학(이하 여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대는 오랜 시간 여성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 여성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온 것이다. 또한 여대는 변화하는 여성주의 담론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교육 공간이 될 수 있다. 김 교수는 “페미니즘 교육은 특정한 정답이나 획일적 이념을 주입하는 방식이 아니다”며 “여대의 페미니즘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스스로 해석하고 질문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과거에 비해 사회적 성평등이 이루어졌단 이유로 여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여성 의제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2023 국가성평등지수’에 따르면 2023년 지수는 2022년보다 0.8점 낮은 65.4점으로 집계됐다. 정부는 여성의 경제 활동 확대를 위한 기본계획을 발표했으나 성평등 정책 전반에 대한 예산 조정과 성평등가족부 개편 등을 거치며 오히려 여성 지원에 대한 축소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공격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한국 사회에 여성들의 공론장이 충분히 제공된다고 보기 어렵다.
여대는 단순히 성별에 한정해 통칭되는 것이 아닌 여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 여대가 여성들의 안전한 공론장이 되고 그 공론장을 사회로 넓혀 나갈 때 우리사회 속 성평등 담론 역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