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다
정대건 작가와 함께한 제21회 작가와의 대화
지난 19일, 우리대학 대강의동에서 본사가 주최한 제21회 ‘작가와의 대화’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급류>, <GV 빌런 고태경> 등을 집필한 정대건 작가를 초청해 ‘급류 속에서 헤엄치는 법: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행사는 △작가 소개 △1부 강연 ‘영화에서 소설로’ △2부 강연 ‘이야기의 세계’ △사전 질의응답 △추첨회 △사인회 순으로 진행됐다.
힙합 키드에서
소설가가 되기까지
저는 오늘 이야기를 쓰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릴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인생에 한 번 대입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흔히 모두가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하잖아요. 나는 지금 인생이란 이야기에서 전개상 어디쯤이고 어떤 캐릭터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10대 중반부터 20대 중반까진 힙합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20대 후반부터 영화감독이 되려고 10년을 보냈고 30대 중반부터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소설가 중엔 독특한 이력인데 먼저 이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드리려고 해요.
저는 대학생 시절 <투 올드 힙합 키드>라는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감독이 됐습니다. 이후 전문적인 직업 영화인이 되기 위해 영화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를 포트폴리오 삼아 한국영화아카데미라는 국립영화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결이 맞는 친구들을 사귀고 영화에 대한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어요. 그곳은 이미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놓고 각자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곳에 가까웠죠.
단편영화를 찍는 1년간의 과정 속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서로 마음이 맞는 짝을 찾는 거였습니다. 경험이 부족한 저와 함께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저를 원하지 않던 친구와 짝이 됐죠.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영화를 찍는 내내 고생했어요. 팀원들은 와해하고 결과물은 폐기 처분을 받았죠. 영화를 직접 찍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구나란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스스로 영화를 만들기에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망가진 상태로 2년을 지냈습니다. 소속도, 기회도 없이 절망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어떤 방식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영화감독은 적으면 10명에서부터 많으면 200명에 이르는 스태프와 배우들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제게 그런 선장 역할은 맞지 않단 걸 느꼈어요. 그래서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뭘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고민한 끝에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하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저는 힙합을 좋아하던 10대 시절 래퍼들이 자기 가사를 쓴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어요. 특히 멋 부린 가사보단 진실한 가사들에서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영화를 볼 때도 상처가 있고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란 생각이 드는 캐릭터들을 만날 때 위로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 도서관을 열심히 다니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
그렇게 저의 첫 소설인 <GV 빌런 고태경>을 내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책에 제 아픔들을 많이 담아냈어요. 소설 속 승호라는 인물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무언가 간절히 열망해 본 분들이라면 공감하실 것 같아요. 전 분명히 영화를 너무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영화계 소식을 듣기가 싫은 거예요.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를 보고 싶지도 않고 점점 미워지더라고요. 사실 영화를 만들던 환경과 사람들이 제게 상처를 줬을지언정 영화 자체가 저한테 상처를 준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제가 사랑했던 영화와 멀어지고 있단 사실에 마음이 안 좋았어요.
애정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혼자서 분투한 결과 나온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인 것 같아요. 무언가에 상처를 입으면 사람이 아예 냉소적으로 변하거나 그것을 미워하기 마련인데 이땐 그러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이었어요.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자 관객과의 대화에서 늘 이상한 질문을 하는 고태경이란 인물이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평범한 일화를
이야기로 만들려면
오늘 하루 우리가 여기 오기까지 있었던 일들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일화는 이야기가 될 수 없어요. 그 이유는 이야기의 요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엔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해요. 이것이 오늘 강연에서 제일 핵심적인 내용이자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해 봤으면 하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욕망이에요. 욕망은 쉽게 말하면 목표인데요. 캐릭터가 욕망이 없으면 이야기가 성립할 수 없어요. 어떤 욕망이어야 되는가는 정답이 없지만 강한 욕망이어야 돼요. 그리고 이 욕망은 곧 결핍이에요. 우린 이미 충족된 것을 욕망하지 않아요. 그 욕망은 각자가 타고나는 거죠. 욕망을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뭔가를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이야기엔 장애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에 가치가 생기려면 걸려있는 게 커야 해요. 주인공이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는 가치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쓸 때 초보 단계에서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자신의 분신인 주인공을 너무 사랑해서 고통을 주지 않는 거예요. 조커 같은 악당이 없으면 배트맨도 없어요. 서로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인 거죠.
마지막으로는 변화가 발생해야 해요. 변화는 다르게 말하면 노력이에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주인공이 그냥 한 번 해보고 그만두면 안 돼요. 이걸 달성하기 위해서 정말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결말에서 주인공이 욕망을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거친 여정만으로도 그 인물은 이미 어떠한 변화를 겪은 거예요. 설령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험을 떠나기 전과는 이미 다른 사람이 돼 있어야 한다는 거죠.
삶을 이야기로
바라보는 방법
이야기의 세계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정지예요. 이야기는 계속 굴러가야 해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시도해야 해요. 물론 바로 잘 되지는 않겠죠.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뭔가를 시도했는데 한 번에 된다면 이야기의 가치가 없어요. 되지 않았을 때 포기하거나 멈춰버리면 이야기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흔히 좋아하는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다 어떠한 결함이 있어요. 여러분의 결함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무엇을 욕망할까요? 사실 저는 그게 삶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저는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니 감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인 거예요. 처음엔 음악을 하다가 영화를 했고 결국 글을 쓰게 됐는데 드디어 제게 맞는 신발을 신은 것 같아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다른 누군가가 충고해 줄 수도 없어요. 저 또한 길을 헤매며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 끝에 이 일을 찾게 된 것 같아요. 히어로 영화를 보면 최후의 승리 전에 가장 짙은 어둠을 줍니다. 막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라면 지금이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분들은 자신이 무엇을 부러워하는지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는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들을 때마다 항상 그 성취보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닐 때부터 곁을 지켜준 누군가에 관한 얘기가 제 마음을 건드리더라고요. 제 인생 영화 중에서도 누군가를 만나는 이야기가 많고 제가 쓴 이야기들도 그런 내용들이 많아요. 그건 누가 저한테 정해준 게 아니라 제 삶 속 굴곡에서 생긴 결핍일 거예요. 여러분들도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구체화해 한번 앞으로 나아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