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헤이그는 대한민국 이었다!
현장르포 ‘2007 대학생 헤이그 특사단’
# 100년 전 恨이 서려있는 곳에서 마음이 시려오다
1907년 6월 24일.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의 명을 받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는 헤이그에 도착한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장 안에 출입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울분의 나날을 보내던 중 이준은 끝내 7월 14일 순국했다. 이준의 순국 후, 이상설, 이위종은 분통한 헤이그를 떠나 흩어졌지만 계속
항일과 구국에 투신하는 생을 살아갔다.
▲ 이준열사기념관 | ||
발길을 돌려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던 비넨호프 왕궁의 기사홀(현 ‘드 리더 쟐’ 상원의사당 건물) 앞에 도착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기에 세 특사는 끝내 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했으리라. 그래서인지 100년 후 찾은 이곳은 그 동안 탐방했던 어떤 곳보다도 발길이 무거웠다. 회의장 문 앞에서 입장을 제지당하자 울부짖으며 호소문을 읽어 내려갔을 이위종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 시려왔다.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소로 들어가지 못해 분통했던 그들의 마음이 이렇게나마 전해지고 있었던 것일까?
# 큰 죽음 1000년을 기억하리!
14일 탐방 7일째, 드디어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뜻 깊은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미리 진행 준비를 돕기 위해 기념식이 열릴 뉴베 케르크(Nieuwe Kerk·신
교회)로 향했다. 행사 시작까지 시간이 꽤 남아 여유로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미 수백명의 교민들과 지한파 네덜란드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날이 탐방 일정 중에 한국인을 가장 많이 본 날일 것이다. 마당에선 한국과 네덜란드의 현대 예술가들이 평화와 미래를 주제로
퍼포먼스를 펼쳐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마치 한국 같았다. 낯선 타국에서 기념식이 열렸지만 이 날 헤이그는 태극기로 물들고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한국 같았다. 어제 느낀 시린 마음은 점점 오늘의 화창함만큼 따뜻해져 왔다.
헤이그시는 7월 14일을 ‘이준 평화의 날’로 선포하고 이준 문화유적지를 지정한다고 한다. 100년 전 서러움 속에 순국한 이준 열사의 추모의 열기가 타국에서도 숭고하게 기려진다는 것에 감동이 밀려왔다. 동시에 역사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에게 헤이그 특사 사건을 재조명하여 만천하에 고하겠다는 초심을 되새겼다. ‘여러분, 자랑스러워하십시오! 우리에겐 100년 전 유럽의 한복판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국제 사회를 향해 일침을 가한 세 명의 특사들이 있습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그들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