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대한 집착, 새롭게 태어난 현재

2009-07-06     강병진 <씨네 21> 기자
 두 남녀가 소리를 채집한다. 바람을 머금은 갈대밭 소리, 고즈넉한 산사에 눈 내리는 소리, 어느 산골마을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노동요 가락 등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거나, 과거의 기억이 되어버린 소리를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리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현재의 도시 속으로 전파된다. 즉, 잊혀진 것들을 현재에 복원시키는 게 그들이 할일이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이들의 사랑이야기다. 상우와 은수, 그 중에서도 녹음엔지니어인 상우는 은수의 노랫소리까지도 녹음했다. 지금은 내 옆에서 사라진 여자의 목소리, 상우에게 그 과거의 소리는 무엇을 복원해낼까.

 허진호는 녹음기가 아닌 영화를 통해 상우와 비슷한 일을 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과거의 기억이 어떻게 현재로 환원되는가를 지켜본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예외로 친다면, <봄날은 간다>와 <외출>, <행복>은 모두 “사랑은 어떻게 변하니?”란 질문의 여러 판본들이다. 질문을 하는 쪽은 변하지 않은 사랑, 다시 말해 과거의 사랑에 집착한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은수에게 함께 김치라면을 끓여먹으며 행복했던 과거를 복원시키려 한다. <외출>의 두 남녀는 각각의 남편과 아내가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에 대한 복수심, 혹은 행복했던 과거를 보상받으려 서로 사랑한다. <행복>의 은희는 이들보다 집착의 정도가 더 심한편이다. “뽀뽀를 하면서도 뽀뽀가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사랑했던 남자를 붙잡고자, 그녀는 무릎을 꿇고 빌면서 운다. 앞서 예외로 쳤지만, 사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이 이들보다 더 안타깝다. 그에게 사랑은 이제 막 찾아왔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못한 채 추억이 되어버렸다.  
 과거에 대한 허진호 감독의 집착은 단지 중심인물들의 사랑관에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라 부르는 게 적절한 요소들은 영화 곳곳에 나타난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은 상우처럼 과거를 간직하는 사진사였다. 그는 가끔씩 동네를 찾아오는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남자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 할머니 역시 사랑했던 남편의 젊었던 모습만을 기억하는 치매환자다. 또한 허진호의 남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외치고 싶을 때마다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른다. 비가 내리던 어느 저녁, 사진관에서 다림을 기다리던 정원이 흥얼거린 노래는 동물원의 <거리에서>였다. 상우 역시 창밖의 비를 보며 남진의 <미워도 다시한번>을 부른다. 그런가 하면 은희와 첫날밤을 보낸 <행복>의 영수는 사랑의 세레나데로 해바라기의 <짝사랑>을 노래한다.
 과거를 되살리는 허진호의 영화들을 볼 때, 그의 단편 <고철을 위하여>는 제목부터 그럴싸해 보인다. 주인공은 어린시절부터 남이 쓰던 것을 입고 타야했던 중고인생의 남자 고중철이다. 중철은 성인이 되어서도 중고차매매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그의 꿈은 애인인 윤자와 결혼해 새 가구를 들인 새 집에서 사는 것이다. 그가 ‘순결한 여자라고 믿고 있는’ 애인 윤자는 처음으로 가져본 ‘새 것’이다. 얼마 후 중철은 윤자가 이미 다른 남자와 동거하다 임신까지 했던 과거를 알게 된다. “남이 데리고 산 여자와 같이 산다는 것이 너무 억울한” 중철은 윤자와의 이별을 결심한다. 하지만 차마 연인을 버릴 수 없었던 중철은 “우리 어머니 말씀이 쓰던 것도 잘만 고쳐 쓰면 새것보다 낫다고 하셨다”고 합리화시키며 윤자와 결혼한다. 이야기에서 비약이 있지만, 영화감독지망생 시절의 허진호가 <고철을 위하여>를 통해 제시했던 주제는 이후 그의 장편영화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그가 그려낸 사랑이야기는 이미 있던 이야기를 새것 보다 낫게 만든 것들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환자의 사랑이야기이고, <외출>은 통속적인 불륜극이며 <행복>은 과거 70년대 호스테스 영화의 구조를 따르는 작품이다. 사랑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봄날은 간다>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보기에 과거의 정서로 가득한 이 영화들에게 21세기의 우리는 왜 공명하는 것일까. 허진호의 영화적 세공술이 옛것도 새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사랑에 관한 느낌과 행동은 지금도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해설이 정답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만나고 그렇게 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