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장 순수해질 때

2011-06-04     이주은 <그림에, 마음을 놓다>저자

  “내 무덤 앞에 서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서 자고 있지 않아요. 나는 불어대는 천 개의 바람입니다. 흰 눈 위 반짝이는 광채입니다. 곡식을 여물게 하는 햇볕입니다. 당신의 고요한 아침에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답니다.”

  인디언의 전래 시인데, 이 시를 생각하면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살아있을 때에는 삶이 복잡한 것 같지만 죽어서는 지극히 단순해진다. 비석을 보면 알 수 있다. 내 아버지는 국립묘지에 묻혀 계시는데 비석의 앞면에는 군인 시절의 최종 계급이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돌아가신 장소가 씌어 있다. 아버지에 대한 단서는 아쉽게도 오직 그것뿐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압축적인 한 문장을 고인의 비석에 새겨놓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어떤 이의 비석에는 ‘진실된 자, 여기 잠들다A sincere man is sleeping here(A sincere man is sleeping here)’라고 씌어있다. 한 사람의 기나긴 한 평생을 ‘진실된(sincere)’라는 한 단어에 몽땅 몰아넣을 수 있다니, 오직 죽음 앞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러시아의 화가 보리소프-무사토프의 <수레국화의 화환>은 무덤에 거는 꽃을 그린 것이다. 화사한 오렌지 꽃으로 만든 화환은 행복한 결혼식 날 아름다운 신부가 머리에 두르지만, 창백한 파란 수레국화로 만든 화환은 차가운 비석 위에 걸어놓는다. 나는 염세주의자가 아닌데도 수국이나 수레국화, 도라지 꽃 같은 파란색 꽃에 마음이 간다. 둥그런 형태로 만든 꽃은 삶의 순환적 고리를 뜻하는 은유로도 이해할 수 있다. 
6월은 아버지의 기일이 있는 달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아버지 묘소를 찾아 여쭈려고 늘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착잡할 때 들르게 된다. 그 앞에 서면, 아버지가 특별히 아무 말씀도 해주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단순해지고 명료해지는 것 같다. 

  우리가 무덤 그림을 보는 이유도 그것이다. 서양에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주제로 그린 그림이 많은데, 묘지도 그런 주제에 속할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되새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죽음을 상기하면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해지고,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을 되찾기 때문이다. 정녕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