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과 공존의 딜레마

2013-03-07     손혜경 기자

  몇 주 전, ‘다문화 사회에서의 공존의 조건’을 주제로 한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한 편을 봤다. 다큐에서는 다문화의 충돌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영국 브래드포드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인종도 종교도 모두 다른 그들은 실험의 일환으로 각자 타 문화권의 사회에서 지내며 평소 기피해왔던 다문화의 충돌에 직면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아시아계 무슬림 여성과 백인들이 문화적 차이로 인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은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 했다. 무슬림 여성은 백인사회의 술집에서 일하던 중 그녀의 무슬림 전통 의상을 문제 삼는 백인들과 마찰을 빚는다. 그녀는 자신의 뿌리를 존중해주지 않는 백인들을 이해할 수 없고, 백인들은 영국 땅에서까지 무슬림 전통을 지키려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슬림 여성은 끝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괴로움의 눈물을 흘린다.

  이처럼 다문화 사회 속에서 정체성과 공존의 딜레마는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특히나 민족적 색채가 강하고 타 문화에 폐쇄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체성을 택하자니 공존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고, 공존을 택하자니 정체성은 옅어질 수밖에 없다. 다문화 사회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는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에 사로잡혀 타 민족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정체성과 공존을 동시에 추구하는 바람직한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데 큰 방해요소가 되고 있다.

  다큐는 이런 현실에 새로운 공존의 조건을 제시한다. 다큐 말미에서 분열된 브래드포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자아 발전, 가족에 대한 사랑 등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였다. 다르다고만 느꼈던 사람이 나와 같은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견제의 철책이 사라지고 공존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차이의 장벽을 허물고 그 속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문화 사회로의 과도기에 놓여 있는 우리가 정체성과 공존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차이의 벽을 허물고 그 속을 들여다보자. 그곳에 공존을 위한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