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 핫 플레이스 덕성, 사학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되다
[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 핫 플레이스 덕성, 사학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되다
  • 오영희 심리학과 교수
  • 승인 2018.10.0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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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대학은 1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존립했다. 그만큼 덕성의 역사는 가치 있다. 모든 역사는 현재로 통한다. 앞으로 나아갈 덕성의 미래를 위해 덕성의 100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동토의 왕국’
  덕성여대

  나는 덕성여자대학교(이하 덕성여대) 76학번이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2년에 모교로 부임하면서 나는 너무나 기뻤다.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엄청난 축복이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모교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내가 돌아온 모교의 분위기는 너무나 이상했다. 교수들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심지어 연구실이 도청당한다는 공포까지 느끼고 있었다. 또한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질이 너무 나빴다. ‘적립금’이란 미명으로 학생들의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돈을 아끼다 보니 한 학과의 교수 정원은 3명이었고, 최소한의 과목만 개설됐다. 나 또한 ‘정신건강’ 강의를 학생회관 대강당에서 300명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너무나 힘들게 강의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에 처한 덕성여대를 두고 사람들은 ‘동토의 왕국’ 또는 ‘동물농장’이라고 불렀다. 왜 덕성여대가 이 지경이 됐을까?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박 전 이사장의 치밀한 교권과 인권 탄압의 결과였다. 

 

  재임용 해직으로 시작된
  덕성 민주화 운동

  1997년 3월, 개강하고 나서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사학과 한상권 교수(이하 한 교수)가 재임용에서 부당하게 탈락해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강의평과 연구실적이 모두 좋았지만, 1990년 학내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교내질서를 문란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1991년 3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후 반성과 개전의 뜻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7년 뒤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한마디로 재단 이사장에게 미운털이 박혀 해직된 것이다. 한 교수의 재임용 탈락은 모든 교수에게 보내는 이사장의 경고였다. 조용히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누구든 자를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

 

  덕성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다

  다행히도 한 교수는 자신을 부당하게 해직시킨 박 전 이사장에게 끈질기게 저항했다. 성명서 발표, 출근 투쟁, 외부의 학계나 민주세력들과의 연대 등을 통해 자신의 해직이 부당하고 교수재임용 제도가 잘못됐으며, 사학재단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을 교내외에 알렸다. 이에 동료 교수의 부당한 해직과 우리대학에서 자행되는 교권·인권 탄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일부 교수들이 1997년 6월에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1997년 10월에는 비상대책위원회가 더욱 확대돼 교수협의회가 됐다. 교수협의회가 조직된 날부터 시작된 교수들의 농성은 205일이나 지속됐다. 내 모교인 덕성이 ‘동토의 왕국’이 된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교수협의회에 가입해 자발적으로 홍보를 담당하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이 때문에 비리 재단과 측근들에 의해서 여러 차례 고소를 당했고 수시로 경찰서, 검찰청, 법원에 불려 다니며 엄청나게 고생했다.

1997년 10월 1일 민주동산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열린 비상총회 <제공/노순택 기자 >
1997년 10월 1일 민주동산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열린 비상총회 <제공/노순택 기자 >

  학생들은 1997년 10월 1일 비상총회를 열어 무기한 수업거부를 결의했다. 아! 그날 민주동산에는 덕성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수인 3,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 그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 후로 학생들은 65일간의 수업거부, 수많은 교내외 시위, 학생회 간부들의 단식과 삭발 등 많은 희생을 치렀다. 당시 광화문, 명동, 종로 등에서 시위를 하면 수천 명의 학생이 모였고, 많은 사람이 덕성의 힘과 열정에 놀랐으며, 이를 다룬 기사가 신문의 주요 면을 장식했다. 그 당시 덕성여대는 말 그대로 ‘핫 플레이스’였다.

  1997년 10월 10일 교육부는 학내 *분규의 책임을 물어 박 전 이사장을 해임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박 전 이사장의 영향을 받는 이사회와 총장 때문에 한 교수의 복직은 계속 미뤄졌고, 덕성 구성원들의 민주화 투쟁도 끈질기게 계속됐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9년 3월 한 교수가 복직됐고, 더 나아가서 1991년에 부당하게 해직된 성낙돈 교수까지 복직됐다. 그 후 덕성여대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러나 2001년 박 전 이사장이 ‘이사장 취임 취소 상소심’에서 승소하면서 이사장으로 복귀했고, 그 즉시 마음에 안 드는 5명의 교수를 해직시키면서 덕성여대는 다시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에도 덕성 구성원들은 힘을 합쳐 비리재단에 저항했고, 그 결과 해직된 교수들이 다시 복직하면서 현재 덕성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게 됐다. 그러다 보니 2001년 12월에는 오마이뉴스가 올해의 인물로 ‘덕성여대 사람들’을 선정하는 경사(?)도 있었다.

출처/교내미디어센터 2002년 차미리사 선생의 건국훈장 수여 기념식
 2002년 차미리사 선생의 건국훈장 수여 기념식 <출처/교내미디어센터>

  덕성 민주화 운동의
  결실을 보다
 
덕성 민주화 운동의 가장 큰 결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정신적 지주이자 뿌리인 차미리사 선생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 동안 꽁꽁 감춰져 있었던 덕성의 자랑스러운 설립 역사는 아주 늦게 재발견됐는데, 그 계기는 덕성여대 민주동문회가 주 관한 ‘2000년 덕성여대 건학 80주년 기념, 덕성여대 뿌리 찾기 대토론회’였다. 토론회에서 한 교수는 지금까지 묻혀 있었던 덕성여대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그제야 우리는 덕성의 설립자가 박 씨 집안이 아니라 차미리사 선생이며 그가 너무나 훌륭한 독립운동가이자 여성 교육의 선각자임을 알게 됐다. 이후 덕성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덕성여대 뿌리 찾기’에 나서서 민주동산에 차미리사 선생의 동상을 세우고, 차미리사 선생이 독립유공자로서 건국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KBS 열린채널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영상인 ‘재회, 어느 사립대학의 뿌리 찾기 (덕성여대)’는 이 같은 덕성여대의 뿌리 찾기 과정을 잘 설명했다.

  또한 부당하게 해직된 교수들도 복직되고 그동안 쌓아두기만 했던 적립금이 교육에 투자되면서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질이 좋아졌다. 예를 들어 교양과 전공과목 개설이 확대되면서 학생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그 결과 과거 300여 명을 대상으로 학생회관 강당에서 대규모로 진행됐던 나의 정신건강 강의도 소규모로 알차게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또 좋은 교수들도 많이 임용됐다.

  우리나라에는 비리를 저지르는 사학재단이 많다. 그러나 사학재단이 워낙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비리재단과 싸워 이긴 학교가 거의 없다. 그런데 덕성여대는 구성원들이 수년간 함께 힘을 모아 끈질기게 싸워서 비리재단을 몰아냈다. 이러한 승리 덕분에 덕성여대는 ‘사학 민주화의 성지’가 돼 전국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됐다.

 

  덕성 민주화 운동,
  앞으로의 과제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덕성여대가 진정으로 ‘사학 민주화의 성지’가 돼 우리사회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힘을 합쳐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덕성여대를 다른 대학들의 모범이 되는 민주적인 대학으로, 좋은 교육을 제공해 사회적 인정을 받는 명문 대학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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