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을 디디듯, 삶을 디디다
누룩을 디디듯, 삶을 디디다
  • 정해인 기자
  • 승인 2021.04.15 2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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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홍로 이기숙 명인을 만나다

당신은 ‘우리 전통주를 3가지만 얘기해보세요’라고 했을 때 이름을 댈 수 있나요? 여성 과학자를 이야기하라는 말처럼 주춤거리며 한두 개 겨우 말하고 말끝을 흐리지 않나요. 왜 와인 종류나 마시는 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교양 있는 사람인데, 전통주에 대한 것은 아는 게 없을까요. ‘우리 술’을 지키는 법은 우리가 알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번 ‘오! 나의 주여’에서는 경기도 파주로 가 감홍로 이기숙 명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토끼야, 용궁에 가면 감홍로가 있단다
  감홍로(甘紅露), 달고 붉은 이슬. 술이 소줏고리에 맺힌 모습이 이슬 같다는 의미로, 임금께 진상하는 술에만 사용할 수 있는 글자였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전주 이강고, 정읍 죽력고와 함께 감홍로를 조선 3대 명주로 꼽았다.

  이외에도 많은 문헌에서 감홍로를 찾을 수 있는데, <별주부전>에서 자라가 토끼의 간을 빼앗기 위해 용궁으로 꾀며 “토끼야, 용궁에 가면 감홍로가 있단다”고 말한다. <춘향전>에서 이몽룡과 춘향이 이별하는 장면에서 향단에게 이별주로 가져오라 시킨 것 역시 감홍로다.

  전통 식품명인 제43호 이기숙 명인(이하 이 명인)은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이경찬 선생(이하 이 선생)의 차녀이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감홍로를 재현할 수 있는 인물이다. 조상 대대로 술 빚는 방법을 전수받아 이 명인이 감홍로를 만드는 제법은 조선 궁중 의원들이 빚은 감홍로와 거의 흡사하다. 이 명인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근거한 공법으로 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밀을 맷돌에 갈고 쌀과 반죽해 꾹꾹 디딘다. 제대로 디디지 못한다면 반죽 사이에 생긴 공기로 인해 충분히 발효할 수 없다. 이를 한 달 동안 발효시키면 누룩이 만들어진다. 감홍로는 삼양주로 밑술을 두 번 증류해서 알코올 도수를 올린다. 이후 △용안육 △계피 △정향 △생강 △감초 △지초 등 7가지 약재를 넣어 1년 이상 숙성시켜 만든다. 용의 눈을 닮았다는 용안육은 동남아 지역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약재지만, 우리나라는 기온이 낮아 재배가 불가능하다. 감홍로는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약재를 조선시대에 수입해서 만들 만큼 귀한 술로 자리 잡았다.
  감홍로는 이름처럼 붉은빛을 띠며 알코올 도수가 40도에 이른다. 감홍로를 마시면 은은하게 단맛을 느낄 수 있고 입안에 계피 향이 남는다. 풍부한 한약재 향도 부드럽게 어우러져 있다. 약재들이 모두 따뜻하고 혈액순환을 돕는 기능을 해 과거 구급약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왕이 마셨던 술을 보존하다
  우리나라에 증류주가 들어온 해는 고려시대였다. 당시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원나라 군사들이 술을 만드는 소줏고리를 보급시켰다. 원나라군의 풍토병을 치료하려는 목적이라고 추측하는데, 이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좋다는 약재를 집어넣어 진통·약용 효과를 넣은 술이 전파됐다. 이전에 단양주로 주조하던 것이 중량주로 변했다. 단양주는 곡식과 누룩, 물만으로 발효해 위가 약주, 아래는 막걸리로 먹었다. 이양주는 밑술이 필요한데, 이 밑술을 기반으로 다시 증류한다. 세 번 하면 삼양주, 네 번 하면 사양주로 이어지는데, 구중에서 십일양주까지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일정 수준에 이르면 도수는 20도에서 더 오르지 않고 술맛도 더 좋아지지 않는다.
  이 선생은 6·25전쟁 후 술을 빚고자 했으나, 양곡관리법 때문에 술을 만들지 못했다. 당시 밀가루 막걸리와 초록 병 소주를 만들 선택지가 있었지만, 이는 먹을 수 있는 알코올일 뿐 술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양곡관리법이 폐지되고 30여 년이 지나 이 선생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이 명인은 그런 아버지가 가시는 곳을 따라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감홍로의 맥이 끊기자, 이 명인이 이를 잇기로 했다. 명인 등록을 위해 알아봤지만, 아버지께 직접 배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등록을 거부당했다. 이 명인은 “아버지가 모임에 나갈 때마다 같이 갔는데 누군가 서류 정리를 하다 아버지가 술을 만드는 강연을 했을 때 책자를 발견했다”며 “거기에 내가 함께했다는 기록이 있어 명인 등록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명인 지정 후 목표는 그저 감홍로 복구였다. 이 명인은 “몇 년 전 이른바 ‘막걸리 붐’이 일었을 때 주변에서 도수를 낮추라는 조언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명인은 도수를 낮추거나 감홍로를 만들 때 나오는 막걸리를 출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 명인은 “내가 돈에 눈이 멀어 감홍로의 ‘원래’를 훼손했다면 후대에서 이것을 어떻게 보존이라고 하겠느냐”고 밝혔다.

 

  감홍로란 ‘내 아버지의 따뜻함’이다
  감홍로 술병에는 술 이름이 없다. 이 명인은 “사람은 술을 이름으로 기억한다”며 “맛으로 기억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술맛으로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병에서 ‘감홍로’라는 이름은 아예 뺐다”고 전했다. 대신 이 명인이 술을 빚을 때의 마음을 새겨 넣었다. 꽃은 향기를 뜻하고 나비는 날개를 뜻한다. 즉, 향기를 가정에 전달해 가정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담겠다는 뜻이다.

  이 명인은 아버지가 독에 술을 담으면 거기서 쪽잠을 주무셨다고 말했다. 술이 독에서 괴는 소리를 들으며 온도를 올려야 할지, 찬 물에 넣어 온도를 낮춰야 할지 보기 위함이었다. 감홍로로 잘 풀리지 않았던 10년 동안은 매달 천만 원가량의 적자를 감당했다. 어떻게 이렇게나 노력할 수 있었냐는 물음에 이 명인은 “나는 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아버지 한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나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명인은 아버지가 노력하셨던 그 어려운 시절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처음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기 위해 매출이 어떤지 관심을 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적자를 지나 어느 정도 발생한 수익은 또다시 감홍로 제조를 위해 투자했다. 이 명인은 “젊은이들이 보면 참 우스운 생각일 수도 있다”며 “하지만 아버지에게 좋은 것을 물려받았으니 나도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명인에게 감홍로는 아버지 그 자체다. 이 명인은 “나에게 감홍로란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내게 전달한 술이다”며 “나는 그 따뜻함을 보유하고 있고 이를 후대에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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