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로 빚어낸 기적, 전통을 일으키다
녹두로 빚어낸 기적, 전통을 일으키다
  • 황보경 기자
  • 승인 2021.05.28 1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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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온주 박현숙 명인을 만나다

당신은 ‘우리 전통주를 3가지만 얘기해보세요’라고 했을 때 이름을 댈 수 있나요? 여성 과학자를 이야기하라는 말처럼 주춤거리며 한두 개 겨우 말하고 말끝을 흐리지 않나요. 와인 종류나 마시는 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교양 있는 사람인데, 왜 전통주에 대한 것은 아는 게 없을까요. ‘우리 술’을 지키는 법은 우리가 알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번 ‘오! 나의 주여’에서는 서울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을 방문해 향온주 박현숙 명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녹두의 향긋함을 담은 왕의 약주

 밀이 아닌 녹두로 빚는 술이 있다. 왕의 건강을 위해 빚은 약주, 향온주(香溫酒)다. 궁궐에는 약국 역할을 하는 내의원이 있는데, 내의원 양온서에서 어의가 약주인 ‘내곡향온’과 ‘내국법온’을 직접 관리했다. 그중 내국향온이 향온주다. 향온주는 약주인 만큼 해독작용이 뛰어나고 독기를 제거하는 효능이 있다. 조선시대 숙종은 자신이 마시던 향온주를 ‘궁온’이라고 표기했다.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 <규곤시의 방>을 비롯한 고문헌에 ‘궁중술’이라고 나온다. 숙종 7년, 장희빈과 남인 세력의 득세에 민가로 유폐당한 인현왕후는 병이 매우 깊어져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시녀들이 대궐에서 향온주를 가져와 세 수저 먹이니 기운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향온주는 왕실 식구를 위한 약주로 빚었을뿐더러, 발효주를 마시면 설사가 잦았던 중국 사신들과 외교할 때도 대접했다.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9호 향온주 보유자인 박현숙 명인(이하 박 명인)은 정해중 선생(이하 정 선생)을 이은 2대 향온주장이다. 녹두로 누룩을 빚어 향온주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박 명인의 향온주는 ‘녹두곡’이라는 특수한 누룩을 발효제로 쓴다. 쌀이나 밀이 아닌 녹두를 이용해 누룩을 만든다. 자흑색 찹쌀로 지은 고두밥에 누룩가루와 끓는 물을 붓고 항아리에 안쳐 20일 동안 발효시킨다. 두 번째부터는 현미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다시 증류하는데, 이 과정을 무려 12번을 거치고도 반년을 숙성시켜야 한다. 향온주는 맑고 투명한 모습만큼이나 맛도 시원하고 담백하다. 알코올 도수가 40도를 넘지만 은은한 향기와 깊은 맛이 나 목에 부담이 없다. 마시고 나면 입안에 감도는 그윽한 녹두향이 일품이다.

 

  레시피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다
  향온주는 왕이 마시던 귀한 궁중 약주이기 때문에 상세한 제조법이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당시에는 왕의 음식과 약재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중죄였다. 왕이 마시던 향온주도 마찬가지다. 박 명인은 초기에 향온주를 밀 누룩으로 빚었으나, 박 명인의 어머니는 ‘밀이 아닌 녹두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녹두는 담백질 함량이 높아 누룩으로 만들기 매우 어렵다. 현대에서도 녹두를 온전하게 발효시키는 기술은 없다. 균을 첨가해 만든 계량 누룩에 녹두를 섞은 것은 순수하게 녹두만을 사용해 발효균을 만들어 내는 진짜 녹두곡이 아니다. 박 명인은 녹두로 누룩을 빚기 위해 10년간 녹두 100가마니를 넘게 사용하며 연구했다. 녹두 공장의 전문가까지 찾아가며 발효법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녹두로 누룩을 어떻게 빚냐’며 손사래 쳤다. 그러나 오랜 노력 끝에 박 명인은 녹두 누룩을 빚는 것에 성공했다. 발효 과정에서 방부 역할을 하는 약초를 찾아 즙을 짜 넣는 것이 녹두 누룩을 빚을 해결책이었다.

 박 명인은 어머니가 생전 녹두의 발효를 돕기 위해 약초를 사용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온 하천을 찾아 헤맸다. 원래는 하천에 흔한 식물이지만, 요즘은 하천을 전부 산책로로 개발해서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초복과 중복, 말복 사이가 아니면 즙을 짜내기도 힘들어 확보가 한시적이라는 특징도 녹두 누룩을 만드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박 명인은 10년 동안 오로지 녹두 누룩을 만들기 위해 달려왔다. 그 노력으로 궁중에서 만들던 향온주가 탄생할 수 있었다. 박 명인은 “어머니는 항상 ‘향온주는 녹두로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하셨다”며 “어머니의 따가운 질책이 아니었다면 향온주를 밀로 만드는 줄 알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전통주가 살아야 전통이 산다

 향온주는 일제강점기 때 맥이 끊겼다고 알려졌으나, 인현왕후의 집안에서 하동 정씨로 제조법이 전해져 대대로 내려왔다. 박 명인의 외가가 바로 하동 정씨다. 1993년 여러 방면의 전문가가 박 명인의 향온주가 ‘궁중술’과 일치함을 확인한 후, 서울특별시에서 주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당시에는 법적으로 50세 이상이어야 명인 지정이 가능했는데, 박 명인은 44세로 나이를 충족하지 못해 정 선생을 1대 향온주장으로 모시고 2002년에 자리를 물려받았다. 현재 향온주는 상업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녹두는 조금만 실수해도 쉬어 버리고, 성공하더라도 발효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그래서 녹두로 균일한 품질의 누룩을 빚는 것도, 대량생산도 아직은 어렵다. 박 명인은 녹두를 발효시키는 미생물 배양에 성공하면 상업화를 시작할 예정이다. 박 명인은 “향온 주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향온주 상업화를 계획하는 이유도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귀한 유산인 향온주가 이름을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 전통주가 힘을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박 명인의 첫 번째 목표는 녹두 누룩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라고 한다. 박 명인에게 향온주란 궁궐의 유산이고 민족의 자존심이다. 전통주가 발전해 대중이 즐겨 마시는 술로 정착한 해외와 달리, 우리나라는 소주와 막걸리를 제외하면 삶에 밀접한 전통주가 거의 없다. 박 명인은 “물에 희석한 공장형 소주는 한국의 대표 술일 수 없다”며 “술을 알코올로 바라보지 말고, 요리를 마무리 짓는 화룡점정으로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통주가 살아야 한식도 함께 발전하고, 우리 전통의 위상을 되찾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사진 정해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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