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제45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 이건희(미술사학 4)
  • 승인 2021.12.06 0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카이브>

  일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죽을 만큼 피곤해도 죽지 않는다. 피곤해서 죽는 사람은 없다. 하루 열 시간을 찜통에서 택배를 나르는 사람들도, 벽돌 더미를 맨손바닥으로 옮기는 사람들도, 하루 삼천 통의 전화를 받고 욕을 먹는 사람들도, 피곤해서 죽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사망원인은 급성심근경색이고, 매독 합병증이고, 유전적 기질로 인한 간암이지 수면부족과 스트레스가 아니다. 그러니, 그만 자고 일어나야 한다.

  김은 매일 아침, 보통 6시 38분쯤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생각은 언제나 적중한다. 죽을 것 같은 김은 매일 죽지 않는다.

  죽지 못한 김은 언제나 7시 10분에 집에서 나서고, 버스는 언제나 7시 13분, 가끔 15분에 정류장에 도착한다. 언제나 자리가 없는 버스는, 언제나, 김의 앞에 서지 않는다.

  버스가 거칠게 핸들을 틀었다. 승객들은 비명 한 번 내지 않고 노련하게 중심을 잡았다. 버스가 급정거를 한 순간 자리에 앉아있던 검은 셔츠를 입은 여자의 핸드폰이 반동에 의해 날아갔다. 사람들은 이상한 추임새를 뱉으며 몸을 주춤거리며 피했다.

  내동댕이쳐진 핸드폰 주변으로 작은 원형이 만들어졌다. 김은 서핑을 하듯 움찔움찔 균형을 잡으며 핸드폰을 주우러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오묘한 불편함에 사로잡혔다. 여자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날쌘 동작으로 여자가 의자에 올려두었던 핸드백을 바닥으로 내린 뒤 자리에 앉았다. 여자의 핸드폰을 주워주는 것엔 무관심했던 버스 안의 사람들은 여자가 어떻게, 얼마 정도의 비참함으로 가방을 주울 것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다. 여자가 허리를 숙이자 파란 셔츠를 입은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재빠르게 훔쳐보았다. 여자가 핸드폰 액정을 만지작거린 뒤 한숨을 내뱉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여자가 급하게 바닥의 가방을 챙겨 들곤 부저를 눌렀다.

  김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찐득찐득한 봉에 매달려 창밖으로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쭈그려 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버스는 여자가 파묻은 얼굴을 들기 전에 새로운 사람들을 싣고 출발했다. 버스가 멀어짐에 따라 여자의 모습은 하나의 작은 덩어리처럼 흐려졌다. 여자는 한참 동안이나 쭈그려 앉은 상태를 유지했다.

  버스가 세 번째 과속방지턱을 넘었을 때, 버스 내부 모니터의 전파가 끊겼다. 갑작스러운 정적에 사람들은 숨소리의 볼륨을 줄였다. 다시 연결된 모니터엔 이미 새로운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니터엔 김이 다니는 회사 아케이드와 회장의 사진이 콜라주되어 보란 듯이 박혀있었다. 회장의 폭언과 폭행에 대한 운전기사들의 고발을 정리한 진보 언론사의 단독 속보였다.

  운전기사들이 제시한 증거엔 녹취록은 물론 미리 작성해놓은 사직서와 유서, 타박상과 공황장애 진단서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김의 회사는 삽시간에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회사 단체 메시지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핸드폰이 끓는 주전자처럼 끊임없이 흔들렸다. 김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공간의 기류가 순식간에 변화하는 극적인 기분을 느꼈다. 김의 옆에 선 남자 하나가 김의 가슴께, 정확히는 사원증을 빤히 바라보았다.

  김은 그대로 낯선 정류장에 내려 택시를 탔다. 김은 목적지를 묻는 기사에게 회사 맞은편 빌딩의 이름을 댔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도 김의 회사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 사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여자가 싹싹하게 물었고, 남자는 건방져 보일 정도로 시니컬하게 답했다.

  바라볼 필요가 있나요, 굳이?
  재벌들 사건사고, 사실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노동자를 자기 시종처럼 보는 건 부지기수고, 모욕한다든지, 더 나아가 폭행한다든지. 계속해서 문제들은 있어 왔거든요. 근데 이 문제가 ‘문제’ 삼아지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사람들이 이제야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이건 다시 말해서 이제 겨우 인지의 단계라는 거지, 해결은 한참 멀었다는 건데…….

  쓰레기 같은 새끼들. 근데 우리나라는 대기업 없으면 죽어. 그치?

  대답을 바라지 않은 질문을 던진 기사가 재채기를 터뜨리며 그 반동으로 클락션을 눌렀다. 앞의 흰색 K5에서 욕설이 날아왔다. 양아치 새끼. 기사는 어딘가 새침하게 중얼거린 뒤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김은 창밖을 바라봤다. 차창 너머로 평창동 저택들의 향연이 스쳐 지나갔다. 넓은 구획과 높은 벽. 정돈된 수풀과 누구도 훔쳐보지 못하기에 크게 트인 창. 견고한 차고의 문과, 걸어 다닐 일이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도보. 김은 질서정연하게 쌓인 고급 박스들과 같은 집들을 보며, 동시에 서울 구석에 미미하게 박혀있을 자신의 6평짜리 방을 떠올렸다. 하늘이 검은빛으로 꿀렁거렸다. 저녁엔 비 소식이 있었다. 창문을 잘 닫고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김은 끊임없이 메시지가 밀려드는 핸드폰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회사 사옥 앞엔 이미 목에 카메라를 건 기자들이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본인들의 지정석인 회사 아케이드 뒤 음식물 처리장 자리를 뺏긴 비둘기들은 빼곡하게 전선 위로 이주한 상태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비둘기들은 기자들이 몸으로 막아선 음식물쓰레기통을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은 출근하는 직원들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 붐마이크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남자들의 눈치를 보며 사수 최에게 전화했다.

  -앞에 기자들이 쫙 깔려 있어요.

  김이 숨죽여 말하자 분주한 최는 원무과가 건물 지하 일층 문구점 앞에 종이봉투를 준비해 놨다는 말을 했다.

  -봉투요?
  -어 봉투.
  -봉투를 왜,
  -얼굴 팔리기 싫으면 머리에 써.

  김은 최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김이 어색하게 웃자 최가 정색했다.

  -웃겨?
  -아닙니다.

  김은 사수의 말대로 소각장 옆 주차장을 통해 지하 일 층으로 내려가 종이봉투를 썼다. 젖은 숨이 좁은 면적의 봉투 안을 메웠다. 지하에 용케 숨어든 기자들이 검지로 두 개의 구멍을 뚫은 후 이제 막 봉투를 뒤집어쓴 김을 향해 플래시를 터트렸다. 김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걸었다.

  지하에서 김이 봉투를 쓰고 도망칠 동안, 15층 홀에선 회장의 공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건이 발생한 지 한 시간 십 분 만이었다. 회장은 허리를 구십 도로 꺾은 뒤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읊기 시작했다.

  최근에 보도된 일과 관련하여 물의를 일으킨 점, 에,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 어, 저의 행동으로 상처를, 받으신 분들께 용서를 구합니다. 어, 머리 숙여, 예, 머리 숙여서 사죄를 드립니다(이 부분에서 머리를 깊게 숙이십시오).

  회장이 13초 정도의 서툰 낭독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오자 기자들은 잠시 벙쪘다. 정신을 빨리 차린 기자 몇몇이 단상 앞을 몸으로 막아서고 질문은 받지 않느냐 물었고, 피곤한 회장은 안경을 거세게 벗었다.

  김의 부서를 포함한 다양한 부서 임원들이 경호인력에 힘을 실어 기자들을 밀쳐냈다. 기자 하나가 송사리처럼 격렬한 몸짓으로 인파를 뚫고 회장 앞에 섰다. 회장도 걸음을 멈췄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습기 찬 갈색 안경을 쓴 기자가 물었다.

  -다 됐고요.
  -…….
  -왜 직원들이 머리에 봉투를 써야 합니까? 

  인상을 찡그린 회장이 고개를 돌려 네 명의 국장 중 하나의 국장을 홱 노려보았다. 하나의 국장과 도합 네 명의 국장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회장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플래시가 쏟아져 내리는 폭우처럼 회장의 몸을 삼켰다. 네 명의 국장 중 하나가 양복 마이를 벗어 회장의 얼굴을 가렸다. 곧이어 세 명의 국장 모두 후다닥 마이를 벗어 회장을 감쌌다. 마이를 입지 않은 팀장은 넥타이를 풀어 최대한 면적을 넓히며 가리는 시늉을 했다. 회장은 움직이는 텐트처럼 유유히 홀을 빠져나갔다.

  -요즘엔 무슨 일을 하니?
  -아카이브.
  -아카이브가 뭐니?
  -아카이브.
  -그러니까 아카이브가,
  -아카이브는 그냥 아카이브야!

  김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미안하다, 쉬어라.

  김은 잠들기 직전 온 엄마의 전화를 받은 것을 후회했다. 엄마는 이제 막 아홉 시 저녁 드라마 시청을 마치고 빨래를 개며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이제바깥완전여름 · 네가조아하는 ㅡ 복숭아철이다이제 · 집오면 봉숭아 깎아줄께 ㅡ 잘자라딸

  김은 엄마의 문자에 답장하지 못한 채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다 잠들었고, 정확히 6시 38분에 눈떴다. 김은 입사한 이래 계속해서 아카이브 작업을 해나가는 중이었다. 팀장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김은 회사재단의 지원을 받는 수급자 장학생 둘과 함께 지하 2층 임원주차장 창고에 쌓여있는 박스를 수레에 실어 부서로 나른 뒤, 그 안 내용물을 엑셀화하는 작업을 했다. (1)싣고, (2)나르고, (3)정리하고, (4)다시 나르는 일.

  김은 단 한 번도 그러한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특히 (2)나르고, (1)싣고, (4)나르는 일은 김이 예상하던 <일>의 범주를 벗어나 있던 것이었다.

  김이 작업 초기에 난처한 기색을 하자 팀장은 막노동 대신 아카이브라는 단어를 꺼내들었다. 그는 이가 얼마나 실무적이고 중요한 것인지를 피력하기 위해 잡일만 하던 자신의 무급 인턴 시절을 설명했고, 자신이 보았던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쓰레기통을 비우고 선생들이 쓴 컵을 설거지하는 인턴의 얘기도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김이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기억하라고 했다. 회사에게 감사하고, 이 좋은 대우를, 언제나 기억하라고 했다.

  하지만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사수는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지하 창고의 문을 걸어 잠갔다. 차를 대는 임원들이 박스를 빼는 모습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다들 예민하거든 지금.

  닫히는 문 사이로 김은 사수가 제 얼굴에 휴대용 선풍기를 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김은 네, 힘차게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목소리 끝이 바르르 떨렸다. 이상한 괴성을 내며 박스를 들어 올리는 스물여덟의 컨버스는 볼품없이 찢어져 있었다.

  여덟 개의 박스를 수레에 실어 회의실로 올라온 후, 김은 어지러운 정신이었다. 김은 텀블러에 담아온 생수 오백 미리를 한 방에 비운 뒤, 의자에 쓰러지듯 널브러져 있는 장학생들에게 말했다.

  -더운데 고생들 하시네요.

  스물여덟이 연극배우처럼 웃었다.

  -고생은요. 인턴이 이런 일 하는 게 고생이지.

  원래는 이런 일 안 하는데. 스물여덟의 속삭이듯 덧붙이는 말에 스물다섯이 피식거렸다. 김은 스물여덟이 어딘가 열받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김이 무던하게 시선을 돌렸다. 스물여덟 장학생이 시선을 서류에 박은 채 물었다.

  -어린데 벌써 인턴을 해요?
  -네.
  -월급은 얼마나?
  -팔십이요.
  -팔십?

  스물여덟이 스물다섯과 눈을 마주쳤다. 미묘한 눈빛을 주고받던 둘이 동시에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스물다섯이 웅얼댔다.

  -막 시간당 오천 원도 안 받고 일하는 거 아냐?

  스물여덟이 사람 좋아 보이도록 노력하며 쨍한 목소리로 말리는 척 거들었다.

  -에이, 인턴인데 뭐. 예술 쪽은 더 심해요. 특근에 야근까지 다 하면서 삼십 받으면 절한다잖아요?
  -그게 당연한 건 아니죠.
  -뭘 잘 모르시네요.

  스물여덟이 김의 말을 끊는 순간, 김은 발작적으로 욱하며 속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옴을 느꼈다. 김은 대답 대신 물을 한 병 더 떠와 마신 뒤 다시 회장의 회고록을 세기 시작했다. 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극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점점 더 수치심과 분노가 밀려왔다. 김은 끊임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곤 스물여덟의 신발을 노려봤다.

  김은 생각했다.

  너넨 거지다.

  김은 생각했다.

  너넨 거지고, 회사가 뒷돈을 빼돌리는 명목으로 지원하는 돈 몇 푼에 묶여 있는 인간들이다.

  김은 생각했다.

  너넨 거지고, 돈 몇 푼에 묶여있고, 나는 구두를 신고 정장을 입고 출근한다. 

  김은 멈추지 않고 생각했다.

  너넨 거지다. 너넨 거지고, 돈 몇 푼에 묶여 있고, 너넨 거지고, 그러니까 구두를 신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는?

  -있지, 일 때문에 짜증을 내게 되는 상황이 있는데, 이해해. 

  며칠 전 사수는 김에게 칠천 원짜리 된장정식을 사주며 그렇게 말했다. 머쓱한 웃음과 달리 흔들리지 않는 사수의 눈을 보며, 김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이제부터 너에게 막 굴 것이라는 일방적인 예고로 받아들였다. 김의 이해는 올바른 것이었다. 김이 고개를 끄덕인 이후 사수는 김을 <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김은 사수 앞에서 손을 모으고 서는 버릇이 생겼다. 사수가 김에 대한 호칭을 바꾸자 재단관리 부서 내부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차례 김을 <어이>, <야>, <인턴>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김은 손쉽게 그들 모두가 자신을 만만히 여기고 자신에게 막 굴어도 된다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손이 따가웠다. 김은 고개를 숙였다. 박스를 옮길 때 쓸린 상처와 함께 검은 때로 범벅이 돼 있는 손을 보며 김은 낯선 기분을 느꼈다. 김은 입고 있던 투피스 자켓을 벗으며 팔목으로 이마를 닦았다. 차장이 습격하듯 회의실 문을 벌컥 열었다. 스물여덟이 장병인형처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어, 앉어.

  어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차장이 복수가 찬 것 같은 배를 테이블 위에 얹었다. 차장이 정찰기처럼 회의실 안을 가볍게 한 번 훑은 뒤 말을 이었다.

  -어제 내가 술을 좀 먹어서 버스를 탔는데 말이야. 한 너네 나이쯤 됐나? 어린 남자애였단 말이야. 걔도 술을 많이 먹었나 봐. 갑자기 버스가 막 흔들리니까 토를 하더라고. 사람들이 당연히 웅성거리지. 냄새도 나고. 근데 내가 말이야, 괜찮아, 괜찮아 그랬어. 내가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줄 알어? 갑자기 다 걔를 못 본 척해.

  아. 스물여덟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번 일도 비슷한 거야.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여기면 말이야,

  그럴 수 있는 일이 된다고.

  -맞습니다.
  -군대 다녀왔지?
  -예?
  -군대. 다녀왔냐고.
  -다녀왔습니다.
  -요즘 군대에서도 때리나?

  차장이 빙긋 웃었다. 김의 핸드폰이 울렸다. 김은 급하게 홀드를 걸었다.

-핸드폰 좋네.

  차장의 눈알이 빠르게 김의 핸드폰을 훑었다. 김의 액정이 부서진 핸드폰은 나온 지 족히 삼 년은 된 갤럭시였다. 김은 핸드폰에서 최대한 멀리 손을 뗐다. 차장이 나가고 회의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 피곤해요. 너무 피곤해요.

  스물다섯은 혼잣말을 하다 이내 책상에 엎드렸다. 김과 스물여덟은 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그저 죽은 지 이십 년이 넘은 선대 회장의 일대기를 타이핑하거나 80년대 임원들의 골프여행 사진이 몇 장인지를 세는 것에 열중했다. 타이핑 소리를 채워 무기력의 기운이 사라지도록. 다시 멀쩡하게 작업의 연속으로 도달하도록. 김과 스물여덟에겐 남의 지침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피곤하거든
  피곤하고 또 피곤해서 끊어지질 않는 아주 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거든

  김은 우울해진 스물다섯을 본 뒤 한결 말끔한 기분으로 장학생들에게 퇴근인사를 했지만,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다섯 발자국 만에 다시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김은 불현듯 자신이 오늘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김은 하루를 회상해보기로 했다. 부분들은 모두 다 폐기해버리고, 결론적으로 남은 것들 위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김은 무려 서른여덟 개의 박스를 열어 삼백육십팔 개의 셀을 완성시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얼댔지만 기분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김의 하루는 고작 박스와 셀, 두 가지의 명제로 치환됐다.

  김은 내일이라는 빈 종이는 어차피 물감이 범벅된 오늘이라는 종이에 찍혀질 데칼코마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것 없는, 같은 색과 같은 무늬의 하루를 살게 될 것이었다. 어제가 된 오늘을 지난 내일엔, X개의 박스를 열고 X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X개의 상처를 손에 얻고 X번의 눈치를 보고 X번의 모멸감을 느낀 채 결론적으로는 X개의 셀을 완성시킬 것이었다.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싸구려 부품처럼, 해낼 것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빛나고 높은 빌딩들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장 같았다. 김은 건물들 사이의 차이점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김은 갑작스럽게 자신이 출발했던 빌딩이 다시 눈앞에서 끊임없이 복제되며 펼쳐지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김의 머리 위로 거대한 검푸른 바다의 파도가 밀려왔다. 김은 눈을 감았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어.

  김이 주문을 외듯 반복해서 생각했다. 모두가, 모두가,

  모두가.

  에어컨 필터에선 썩은 치즈 냄새가 났다. 사이렌 같은 매미 소리는 버스의 닫힌 유리창과 라디오 소리를 뚫고 승객들의 귀를 쳤다. 서울에 능숙한 기사는 버스를 놓친 덩치가 버스 앞문을 부술 듯 두드리며 따라 달려오자 얌전하게 문을 열어주며 안녕하세요, 젠틀하게 인사했지만 그다음 정류장 한 발 차이로 버스를 놓친 망연자실한 여고생은 무던하게 스쳐지나갔다.

  노란 텐트와 이순신, 세종대왕이 밀접한 연결고리로 얽혀 있는 광화문의 풍경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를 둘러싼 기류는 이전의 것과 달랐다. 기한이 오래돼 굳어가기 시작하는 동물의 피를 바닥에 부어놓은 듯한 비현실적인 원색의 기류가 광장의 여백을 모두 집어삼킨 채 무질서한 속도로 울렁였다. 버스 안에 있는 승객들이 모두 멍해져 있던 순간, 버스 앞으로 레이저를 쏘듯 붉은 점 하나가 뛰어들었다.

  씨팔러미!

  급정거를 한 기사가 알이 작은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으며 욕을 반사신경처럼 내뱉었다. 파르스름한 머리의 의경 넷이 후다닥 달려들어 붉은 인간을 통행로로 끌어냈다. 장년의 빨간 티셔츠엔 <개 식용은 건강이다>는 문구가 흰색 볼드체로 박혀있었다.

  김은 그와 버스 앞 유리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검은 얼굴은 얕은 기름에 젖어 반들거렸다. 남자는 퀭한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뭐라뭐라 벙긋거렸는데, 김은 그를 <개>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인파 사이에 놓인 트럭엔 남자들이 하나씩 올라타 독립투사처럼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확성기에선 신토불이라는 단어가 적어도 열다섯 번은 들어간 듯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독립투사들은 무의식중에 신토불이에 엉덩이를 흔들어 박자를 맞췄다. 어린 얼굴의 의경들은 흥겹게 슬픈 그들의 춤을 보며 무전을 쳤다.

  조계사 부근에 진입하자 기류는 변화했다. 파란 티셔츠를 입은 이들이 일렬로 서선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리본을 매단 작은 개를 품에 안곤 광화문 쪽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치마를 입은 하얀 개의 핑크색 앞다리는 작은 악력에도 쉽게 부러질 것 같았다. 서 있는 사람들은 창밖을 보기 위해 앉은 이들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등산복을 입은 남자 노인은 핑크색 커버가 씌워진 자리에 앉은 여자를 빤히 노려보며 제 배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여자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가방에서 임산부 확인증을 꺼내 두 손에 쥐고 있었다. 도색잡지같이 어지러운 핑크의 향연 속에서, 김은 창에 붙은 한 줄의 글씨를 읽었다.

  미래의 주인공에게 자리를 양보하세요.

  미래. 김은 <미래> 밑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확인증을 더 잘 보이도록 바꿔 쥐는 끈적거리는 손을,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발에 죄인 구두를, 허벅지를 포박한 세틴 치마를, 감은 눈꺼풀 위로 바르르 떨리며 굴러가는 눈알의 움직임을, 김은 보았다.

  -창문 여세요.

  기사가 소리쳤다. 차내 에어컨이 꺼졌다. 김은 자신의 숨통이 좁아져만 간다고 느낌과 동시에 땅이 밑으로 꺼지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코로도, 입으로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상한 호흡과 함께 김은 부저를 여러 번 눌렀다. 내려요. 내려주세요. 김이 헐떡거리며 신음했다. 기사가 미러로 김을 앙칼지게 노려봤다.

  당신은 우리 버스의 민폐일세. 당신은 민폐일세. 민폐.

  김은 버스기사가 진짜로 입을 열어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게 다 당신 눈빛 때문이잖아. 김은 소극적인 혐오를 표출하는 기사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퇴근길 만원 버스의 적정 침묵 수준이 수플레의 균열처럼 순식간에 붕괴됐다.사람들은 조용한 흥분으로 김이 더 미친 짓을 하길 내심 바랐다. 아예 밭은 숨을 내뱉기 시작한 김은 승객들의 시선을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김이 자신을 힐끔대는 기사의 당황한 시선을 붙들었다.

  -문 열라고!

  김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기사는 김 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뒷문을 열었다.

  왜 사람들은 소리 지르거나 화내지 않으면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거지?

  김은 비틀거리며 눈앞에 보이는 샌드위치 체인점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밑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에 넘치도록 쌓인 고기는 분홍색이었다. 김이 물었다.

  -이게 무슨 고기죠?
  -예?
  -이게 무슨 고기냐고요.
  -그냥 햄인데요.
  -뭐로 만든?
  -그건 잘 모르겠는데.

  당황한 알바가 뒷말을 얼버무리며 웃었다. 지친 김은 고개를 끄덕이며 베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김은 카드를 긁고 샌드위치를 받은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었다. 마주선 알바는 땀에 흠뻑 젖어 샌드위치를 씹지도 않고 삼키는 김을 이 일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다. 미치거나, 어딘가 많이 아픈 여자라고 생각했다. 돌아온 김은 콘텍트렌즈를 빼지도 못한 채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입가에 호밀빵 가루를 묻힌 김은 희미해지는 렘수면의 경계에서 기괴한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이 낸 것이 아닌 기괴한 목소리가 김에게 물었다.

  미래는 어디에 있습니까?

  차들은 죽어가는 총알처럼 빠르게 8차선 도로를 달렸다.

  정오의 태양은 직선으로 신호등에 서 있는 이들의 머리를 쳤다. 목에 리본이 달린 원피스를 입은 김은 멍하니 반대편의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엔 둔탁한 DSLR이 걸려 있었다. 김의 주머니에서 큰 소리로 벨이 울렸다. 김은 저 검은색 둔기는 사진을 찍는 것보다 사람 머리를 후려치는 것에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에 빠졌다. 김의 옆에 서 있던 쇼핑백을 든 중년 여자가 김의 어깨를 툭 쳤다.

  -전화 오는데.

  발신자는 김 팀장이었다. 김 팀장은 야살 맞고 다정한 말투로 김에게 지금 어디냐 물었다. 옆에 국장이 있군, 김의 입꼬리에 저절로 경련이 일었다. 김은 다시 회사로 들어가고 있다 대답했다. 속이 좋지 않다는 말도 했다. 어지럽다는 말과 땅이 밑으로 꺼지는 것만 같다는 말, 그러니까 미칠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팀장은 실성한 듯 더 길고 얇은 목소리로 웃었다.

  -지금 국장님도 와 계시는데? 분위기 좀 풀어보겠다고 점심에 다 나와 계신데?
  -저 개를 못 먹어요.
  -그래. 그럴 순 있는데, 아이 씨 진작 말했으면 좋았잖아!
  -개 먹는다고 못 들었어요.
  -그 놈의 개! 개! 개! 그냥 영양탕이라고 해요!

  팀장이 괴팍한 돌고래처럼 고함질렀다. 이내 팀장은 숨을 고르곤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있지? 사회생활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팀장님.

  신호등의 중간에 멈춰선 김이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저, 영양탕, 못 먹어요.

  김의 허벅지 앞까지 다가온 검은 세단이 거칠게 클락션을 울렸다. 김은 차창 너머로 와이셔츠를 입은 뚱뚱한 남자와 깊게 눈을 마주쳤다. 남자가 입모양으로 미친년이, 읊조렸다. 김은 다시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팀장은 정해진 점심시간보다 조금 더 이르게 땀에 젖은 장학생들과 김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고, 이내 김에게 단합도모를 위해 윗분들과 점심을 먹을 것이라는 말을 해줬다. 사람을 죽이는 더위와 습기 속에서 물류센터와 다를 바 없는 이 망할 일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김은 뭐든 좋았다.

  팀장은 서류로 부채질을 하며 빌딩 뒤 골목으로 김과 장학생들을 이끌었다.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실내엔 뜨겁고 누린내 나는 증기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있었다. 김은 조선족 여자가 쇠 쟁반에 받쳐 내오는 끓어오르는 뚝배기 너머로 단출한 메뉴판을 보았다.팀장이 미리 앉아 있는 국장 앞으로 허리를 숙이며 다가가는 순간, 김은 그대로 뒤돌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김은 달리고 달리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쇠창살을 물어뜯는 눈이 뒤집힌 말티즈의 작은 송곳니를 떠올렸다.

  송곳니는 미끄러지고 미끄러지다 질질 흐르는 침과 함께 부러진다. 개는 계속해서 잇몸으로라도 철창을 물어뜯는다. 침과 피가 섞여 높은 점도로 뭉개지고, 철창은 핥아진다. 개가 예전에 주인을 핥았던 것과 비슷한 무드로, 핥아진다.

  화장실 네 번째 칸 안 변기 위에 치마를 입고 앉은 김은 발목부터 솟구치는 오한에 덜덜 떨며 구두를 벗었다. 구두는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느리게 떨어졌다. 통풍이 되지 않는 좁은 플라스틱 바닥엔 땀내가 가득 차있었고, 뒤꿈치 부분엔 얇게 벗겨진 살 껍질이 피에 엉겨 붙어 있었다. 화장실 역시 에어컨이 나오지 않았다. 굳게 닫힌 부서 문은 인턴 사원증으로 열리지 않았다. 휴게실에 가 있을까 김은 잠시 고민했지만 부서 사람 중 한 명도 김에게 휴게실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조차 알려준 적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직원 휴게실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김은 이어 생각했다. 김은 애초에 직원도 아니었다.

  김의 가방과 지갑은 모두 회의실 안에 있었다. 김은 앞으로 사십 분가량을 변기 위에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김은 팀장이 개가 아닌 영양탕을 먹고 돌아오면, 그렇게 한층 더 튼튼해진 몸으로 자신을 처참히 린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린치로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의 사회성을 논하고, 자신의 관대함에 더불어 김이 얼마나 모자라고 어리고 그렇게 귀여운지를 처절하게 조리돌림하고, 결론적으로는 김을 지속적인 스트레스 해소용 노리개로 만들어버리는 대신, 차라리 담뱃불로 허벅지를 지지거나 뺨을 주먹으로 갈겨줬으면 좋겠다고, 김은 생각했다.

  김은 휴지를 얇게 겹쳐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이마에 붙였다. 김은 칸 안에 박혀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숨소리를 작게 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가슴을 노출한 어린 여배우와, 군대에 있는 아이돌의 대마초 스캔들과, 새 정부의 향후 방향과, 그 향후 방향에서 배제된 동성애자들과, 개를 먹는 사람과 개를 호적에 올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싸움에 대해 사람들은 열띤 토론을 했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여배우의 가슴이었다.

  가슴이 짝짝이네
  언니 너무 예뻐요
  걸레년
  사랑해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이런 년들은 분명 스폰서가
  사랑해
  내 친구가 얘 친구의 친구인데
  사랑해
  댓글 수준 봐라
  사랑해
  확@실한효과보장*Bl아9ㄹr슾파이시피럴, 사랑해.

  김은 무기력한 배영을 하듯 돋움체로 새겨진 다양한 목소리들을 스쳐 지나갔다. 핸드폰을 쥔 엄지를 끊임없이 놀리던 김은 문득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위권에 위치해 있던 회사 관련 내용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제 버스도 잠잠하고, 택시도 잠잠하고, 회사 사람들도 잠잠하고, 모두가 잠잠하다는 것을, 김은 깨달았다. 김은 파쇄된 장부와 서류들로 만들어진 종이 눈밭에 누워 수많은 바닥의 소리를 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바닥의 소리는 너무나 메스껍고 어지러운 것이어서, 이리저리 얽히기 시작하는 순간 그 의미를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뭐가?

  잘된 일이다.

  김의 호흡이 가빠졌다. 인적 없는 화장실 안 자동 분사 방향제 소리가 났다. 김은 검색창에 회장의 이름을 쳤다.

  김은 가장 첫 번째로 뜨는 7분 남짓의 동영상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지문의 균열 사이사이에 습기가 찬 엄지손가락이 액정에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느리게 떨어졌다. 김은 이어폰을 꽂았다.

  18초, 김의 모든 동작이 멈췄다.

  56초, 김은 핸드폰을 쥔 두 손을 벌벌 떨어대기 시작했다.

  1분 12초, 김은 숨을 코로 쉬지 못하고 입으로 쉬기 시작했다.

  3분 8초, 화장실 타올 바닥에 달라붙은 김의 더러워진 발가락이 꿈틀거렸고, 

  4분 54초, 김의 어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5분 16초, 김의 목구멍에서 이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억억억억.

  5분 38초, 억억억억(사람이 미치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까)

  6분 12초, 억억억억(토스터기가 빵을 뒤집어 뱉고, 엘리베이터가 버튼 하나로 열리고 닫히듯)

  6분 48초, 억억억억(그렇게 쉽게 사람은 미치거나 죽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김이 뱀에 물리거나 이상한 산풀을 뜯어먹은 듯 온몸을 뻣뻣하게 하고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화장실 안에 억억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쳐 울려퍼졌다. 김이 있는 화장실 칸 문고리가 거칠게 흔들거렸다. 김은 이어폰을 빼지도 못한 상태로 밖에서 문이 열리지 않도록 손으로 문을 밀었다.

  -아가씨!

  중년 여성이 소리치며 어깨로 문을 부술 듯 박아댔다. 희미한 정신의 김이 몸을 숙임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김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함께 떨어졌다. 이어폰이 분리된 핸드폰에선 계속해서 동영상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 남은 무언가를 겨우 긁어모아 짜내는 듯한 남자의 흐느낌 소리,

  제발 인격적으로, 인격적으로 대해,

  김이 주저앉은 그대로 핸드폰을 주워 홀드를 걸었다. 쓰러진 김이 서서히 젖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부서 문이 제 확인증으로는 안 열리네요.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미화원을 보며, 김은 그녀가 눈앞으로 무너져내리는 흙더미라도 보는 듯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JW.

  야, 이 새끼야.

  아버지는 언제나 너의 걱정이 많다.

  이럴 때 조심해. 차가 갑자기 뒤로 나올 수 있거든. 어? 그러니까 속도를 늦추란 말야.

  이번에도 수업일수가 모자라 비즈니스 이코노미와 히스토리, 그리고 리터러쳐에까지 F를 받았다는 얘기 들었다.

  대답해. 싫음 내리고.

  너의 부족한 책임감에 아버지는 실망스러울 뿐이다.

  운전하기 싫음 그만둬, 새끼야. 내가 니 똘마니냐? 무슨 얘길 하면 대답을 안 하고 물먹은 벙어리 새끼마냥. 듣기 싫다는 얘기냐고? 

  세상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미래 없는 인간들이 훨씬 더 많다.

  도움이 안 되는 새끼.

  어머니가 모텔 청소와 파출부 등 투잡, 쓰리잡을 뛰어 학교에 보내고,

  요새 젊은 애새끼들 빠릿빠릿한데 왜 우리 회사 새끼들은 다 이런지 몰라, 씨팔.

  그에 대한 보답으로 특별전형으로 하버드에 입학하는 아시안이 세계에는 넘쳐난다.

  건방지게 정말. 운전하기 싫음, 인마, 그만두고 대리운전이나 해.

  그 아이들은 끼니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 새 모이 같은 오트밀을 우유에 퉁퉁 불려 몇 끼니고 먹는다 하더구나.

  누가 너 때문에 그래? 나 때문에 그러는 거지? 씨팔, 너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차에 치여 뒤지든 아무래도 좋아. 근데,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가질 수 있지 않았었니?

  회사 위하는 내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안 되니까!

  MR.H의 도움으로 이번 일은 장학기금을 통해 무마하기로 하였다.

  운전하기 싫으면 그냥 다른 놈한테 얘기하고. 알았어? 쓸데없는 새끼.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말렴.

  인마 너는. 생긴 것부터가 뚱해 가지고 자식이. 살쪄서 미쳐 다니면서.

  언제나 주님의 품 안에서 영광받는 나날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넌 월급 받고 일하는 새끼야. 잊어먹지 말라고.

 사랑한다,

  애비가 뭐 하는 놈인데 제대로 못 가르치고 그러는 거야 이거.

  아버지가.

  -이 박스 누가 정리한 거야?

  스타벅스 콜드브루 얼음 많이 벤티 사이즈를 손에 쥔 팀장이 제 자리 앞의 쌓인 박스를 발로 찼다. 새로운 라벨이 붙은 박스는 깔끔하게 먼지가 털린 채 새로운 테이프로 견고히 묶여 있었다.

  -처음부터 부서 문 열려 있었어요.

  스물다섯 장학생이 퀭한 눈으로 웅얼댔다.

  -목소리 좀 크게 내라.

  오만상을 쓰며 검지로 이를 쑤시던 차장이 스물다섯을 스쳐지나가며 툭 내뱉었다. 스물다섯은 땅을 보며 피식 웃었다.

  -김씨가 먼저 들어와서 했나 봐요. 팀장님 컵에 물이 맺혔다.

  스물여덟 장학생이 게처럼 좌우로 움직이며 팀장의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을 맨손바닥으로 훔쳐냈다.

  -한 시간 만에 혼자서?

  스물여덟에게 컵을 던지듯 맡긴 팀장이 씨익 웃었다.

  -드디어 정신 차렸구먼. 근데 JW가 뭐지. 국장님! JW가 뭐지?

  국장실에 박혀있던 국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망연자실하게 선 국장의 주먹같이 큰 코에 맺힌 땀이 느리게 흘러내렸다.

  -그 박스가 왜 여기 딸려왔어!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팀장이 장학생들을 회의실로 가둬넣었다. 팀장이 가장 위에 쌓인 박스 JW1의 테이프를 뜯었다. 두툼한 서류철과 출력된 이메일 편지, 비행기표 영수증들과 사진들을 훑어보는 팀장의 얼굴은 서서히 굳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그네슘, 혹은 칼슘이 부족한 팀장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이 정신 나간 새끼야!

  국장이 팀장의 코앞에서 고함질렀다.

  -이걸 얘네보고 정리하라고 해?
  -얼마 전에 분명 창고에 있는 거 전부 다 문서화하라고,
  -라벨도 확인을 안 해?
  -아니, 그건, 아니, 최가 말해봐.

  책임을 면피하려는 팀장의 눈빛이 내려오는 파칭코처럼 빠르게 뒤집혔다.

  -나는 창고 한 번도 안 내려갔잖아. 최가 말해봐. 최, 제대로 확인 안 했어?
  -그걸 제가 어떻게 하나하나 확인을,
  -다 됐어! 다 됐어!

  국장이 성난 기관차처럼 말을 반복했다. 국장이 팀장의 어깨를 쥐고 빈 서고로 질질 끌고 갔다. 그는 자녀의 버릇을 고쳐놓겠다 다짐한 폭력부모처럼 최선을 다해 윽박질렀다.

  -이 새끼! 넌! 넌 여기 박혀서! 하나! 하나! 다! 파쇄해! 글씨 하나! 연결 못하도록! 얼굴 하나! 못 알아보도록! 다!

  잠깐만. 최가 말을 끊었다. 울상이 된 팀장과 모든 구멍에서 분노를 줄줄 흘리는 국장이 최를 바라봤다. JW3이 어딨죠? 뭐? 1, 2, 4는 다 있는데, 3이 없잖아.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스물여덟이 머리를 회의실 문틈 사이로 내밀었다.

  -김씨 가방이 없는데.

  선대회장 사진 위에 걸린 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 째깍, 울려 퍼지고, 화장실 네 번째 칸 안 미묘한 표정의 미화원이 김의 널브러진 구두 밑바닥을 핸드타월로 닦고 있는 그 시각, 맨발의 김은 이십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파란 박스를 들곤 지하주차장을 통해 소각장으로 기어 나왔다.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내리치는 볕 밑에서, 김은 생경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이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진짜 해를 만나본 적이 없던 것만 같았다. 얕은 박탈감과 깊은 벅차오름, 코밑을 축축하게 적시는 습기와 열기, 살아있는 바람소리와 차 소리, 매미의 울음소리에 둘러싸인 김은 갑자기 자신의 청력이 지나치게 좋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온몸의 신경이 예민한 돌기를 팽창하는 듯했다.

  박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김의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김은 박스를 바닥으로 내던지곤 목의 리본을 손톱으로 찢어발기듯 잡아 뜯었다. 소각장엔 지하 1층 식당가에서 내놓은 음식물쓰레기통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초점 없는 눈의 살찐 비둘기 무리는 이미 쓰레기통 입구를 비집고 넘쳐흐른 출처를 알 수 없는 붉고 노란 음식물들 위를 점령한 뒤였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새의 부리짓에 따라 짓이겨진 음식물 잔해가 슬로우를 건듯 방울방울 튀어 올랐다. 비둘기 중 몇몇은 머리통이 깨진 듯 눈알이 튀어나와 있거나, 발가락, 혹은 발목 전체가 잘려 있었다. 그 새들은 나는 법을 잊어버린 대신 잘린 발목으로 아스팔트를 경보하는 법이나 참새무리와 싸워 음식을 많이 먹는 법, 길가에 있는 토사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

  이곳엔 비둘기밖에 없다. 달리는 차들과 땀을 흘리면서도 입은 마이를 벗지 않는 남자들과 우는 매미들과 울지 않는 여자들과 이 모든 모습들을 일렁이는 표면에 박제하는 높고 높은 빌딩들. 그것들은 배경에 불과했다. 그것들은 배경이고, 그것들은 죽어 있는 오브제이고, 그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들은 변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고, 그것들은 우회이고,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열기에 휩싸인 김은 박스를 질질 끌고 음식물쓰레기 방향으로 다가갔다. 식사에 열중한 비둘기들은 김의 인기척에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의 가방 안 핸드폰이 끊임없이 진동했다. 김은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음식물쓰레기 통으로 처박았다. 몇몇의 비둘기는 푸드득거리며 삼십 센티 정도 날았다가 그대로 다시 땅으로 착지했다.박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김이 엄지발가락을 이용해 음식물쓰레기통을

  툭,

  쳤다.

  묵직한 직사각형 음식물쓰레기통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곧이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파란 박스 위에 음식물쓰레기가 범벅이 되었다 비둘기들은 바닥으로 점프해 식사를 재개하기 시작했다.

  -미친 거야!

  쨍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김은 소음 쪽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철제문 앞에 안전요원 몇몇과 장학생들, 사수 최, 그리고 팀장이 붉게 익은 얼굴로 김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동자 안엔 공포와 버무려진 분노가 얕은 파동을 그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미친 거네. 진짜 제대로 미친 거네.

  반복해 중얼거리는 팀장이 성큼성큼 김을 스쳐지나가더니 이내 히스테릭한 신음을 흘리며 달려들어 박스 위의 음식물들을 거둬내기 시작했다. 습기를 가득 머금고 뭉개져 내리는 빨간 덩어리들을 맨손으로 조물거리는 팀장의 열성적인 모습은 고난스러운 김장의 한 중심에 선 주부와도 같았다.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쓰레기를 주물러대던 팀장이 헛구역질을 몇 번 해대더니, 이내 정말로 진주황색 토를 바닥 위로 뱉어냈다. 머리를 포마드로 올려붙인 안전요원 하나가 기침을 하는 척을 하며 웃음을 참았다.

  부서 사람들 모두가 박스 쪽으로 머뭇거리며 다가서는 모습을 끝으로, 김은 고개를 돌렸다. 음식물을 맨손으로 치우거나 비둘기를 쫓는 각기 다른 소리를 들으며 김은 회사 정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 한 대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

  택시기사가 녹색 틴트가 들어간 선글라스를 코 밑으로 내리며 물었다. 얼굴이 붉게 익은 김은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노력했다. 좌석에 엉덩이를 더 깊게 묻은 김이 뭉글거리는 여름의 숨을 내뱉었다.

  미,

  김이 입술을 달싹임과 동시에 뒷 택시에서 고막을 짓이길 듯한 클락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급하면 어제 나오지 그랬어, 싸가지 없이. 중얼거린 기사가 세차게 엑셀을 밟으며 제멋대로 말했다. 미아? 미아역은 건너서 탔어야지. 길도 몰라 아가씨는?

  무좀약을 치약으로 착각해 이를 닦았다는 라디오 사연에 기사는 자지러지는 아기처럼 웃었다. 기사가 라디오 소리를 귀가 아플 정도로 키웠다. 김은 창문을 반쯤 내렸다. 김은 덥고 더러운 도로의 바람을 맞으며, 눈앞에서 치직거리는 질나쁜 필름이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스너프필름같이 축축한 흑백의 세상에선 이빨 빠진 더러운 개와 발목 잘린 비둘기가 서로의 발과 날개를 잡고 빙글빙글 도는 춤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김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입을 벌렸다. 김은 눈을 같은 채 매연과 미세먼지, 출처를 알 수 없을 꺼끌거리는 실밥을 꿀떡거리며 집어삼켰다. 눈을 감아도 개와 비둘기의 원시의 춤은 멈추지 않았다.

  김은 낮게 비행하는 비둘기 떼가 차창 위를 지나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제45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수상소감>

  스물하나의 여름, 아주 덥고 기분이 항상 좋지 않았던 시절에 썼던 소설을 우연히 꺼내들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일, 특히 소설을 쓰는 일은 어른이 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스물이 넘고 나서도 열일곱이 마시는 카스처럼 언제나 숨어서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스물하나 이후에도 몰래 글을 쓰는 일은 멈추지 않았지만, 유난히 저 시절의 여름이 담긴 소설은 학교에 바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학교의 사계절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여름엔 플라타너스 냄새가 가득하고, 겨울엔 대강의동 뒷편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의 털옷이 조금 더 두꺼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 학교 안에서 몇 개의 햄버거를 먹어치우고, 몇 번의 밤을 새우고, 몇 개비의 담배를 피워내고, 몇 번이나 울고, 또 몇 번이나 웃었는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서울 어디에 있든 학교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이상한 방식의 위로를 받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삼포 가는 길>의 삼포가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는지를 내 몸처럼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졸업 이후에도 덕성에 여전히 찾아올 사계절을 생각하면 조금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졸업 전 좋은 추억을 만들 기회를 주신 덕성여대신문사와 학교에 감사합니다. 앞으로 다양한 일들을 하며 살겠지만, 읽고 쓰는 것은 언제나 즐거울 것 같습니다. 숨어서 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고, 또 더 많이 쓰고 싶다는 소원을 산타에게 빌면 매를 맞을지 궁금해집니다. 어쨌거나, 모두의 이번 겨울이 잔잔하고 즐겁게 흘러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