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횃불로 자라기 위해
촛불이 횃불로 자라기 위해
  • 하승우(지행네트워크) 운영위원
  • 승인 2009.07.06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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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또는 촛불시위는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문화로 자리 잡았다. 해가 진 저녁을 밝히는 촛불은 중요한 사회적 결정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신념의 불꽃을 뜻했다. 또한 이런 촛불의 흐름이 한국사회에서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동안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해 왔고 시민들이 그 과정에서 배제되어왔다는 점을 증명한다. 촛불의 구호나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사안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저항문화는 권력구조의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촛불시민의 저항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고 있다. 경찰은 상습 시위꾼을 검거한다며 촛불시민을 조사하고 인터넷 IP를 추적한다. 거리에 나와 중무장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을 상습적으로 즐길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리고 대법관 재판과정에 개입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고(법관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컴퓨터로 재판을 하는 게 옳다),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집시법, 방송법, 정보통신법 등을 다수당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힘이 장땡이라면 국회의원을 쌈박질 순으로 뽑는 게 옳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입법, 행정, 사법체계의 삼권분립조차 무시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저항의 이유가 사라지기는 커녕 더 많은 이유들을 만드는 이 같은 현실에서 과연 시민들이 촛불을 꺼야 할까? 아니 과연 촛불이 꺼질 수 있을까? 물론 정부의 강한 탄압이 일시적으로 촛불의 흐름을 주춤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결코 권력의 억압이 자유를 가둘 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해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영원한 왕국을 건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역사만 봐도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이 탐관오리나 왕에게 반기를 들며 수많은 반란을 일으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는?
더구나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는 시민들이 저항의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한다. 유럽에서는 ‘700유로 세대’가 그리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옆 나라 일본에서도 2천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쿄의 히비야공원에 모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일자리를 달라고 구걸하는 게 아니다. 경제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고통을 주지 않는다. 위기는 힘을 가진 자에겐 기회였고 모든 이가 고르게 누려야 할 공동의 재산은 그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어 왔다. 상위 10%의 사람들이 전 세계 부의 85%를 독점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이고, 불행히도 그런 불공정함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전 세계적인 분노는 부를 독점해 온 사람들에게 그 부를 공정하게 나눌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저항의 흐름이 뭉쳐 촛불이 횃불로 변한다면, 어떠한 권력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권력은 촛불이 횃불로 타오르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우리 88만원 세대가 거리보다 도서관에서 스펙쌓기에 열중하기를 원하고, 함께 모여 공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것보다 따로 떨어져 서로 경쟁을 벌이기를 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바로 대안이다
그런 방해를 뛰어넘어 촛불이 횃불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대화와 만남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문제제기와 대안은 분리되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신념을 품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와 우정을 쌓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만나는 과정(특히 국가나 학교, 기업이 꺼리는 사람이나 모임을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지 않은 지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만남 속에서 자연스레 새로운 운동이 출현할지 모른다. ‘그런 운동이 가능할까’라고 미리 물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운동의 흐름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뜻을 드러내고 토의하는 과정이기에 운동의 방향을 예측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운동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화가 운동으로 확장되고 단단해질 수 있다면, 대안사회는 꿈이 아닌 현실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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