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공학자도 운칠기삼?
과학자, 공학자도 운칠기삼?
  • 강석기(과학동아) 기자
  • 승인 2011.05.21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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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한때 유행어다. 그런데 사실 1등만 기억하는 가장 냉혹한 사회는 과학계나 공학계가 아닐까. 과학자나 공학자는 무엇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사람들. 따라서 가장 먼저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사람이 모든 것(명예와 부)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우선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유다.

 

다른 시대나 남자로 태어났다면

 

  지난 겨울 미국 뉴욕에서는 <사진 51(Photograph 51)>이라는 연극이 상연됐다.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삶을 그린 이 연극은 그녀의 불운을 여성차별과 반유태주의(프랭클린은 유태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폐쇄적인 태도에 두고 있다. 1950년대 초 영국 런던대에서 연구하던 프랭클린은 뛰어난 X선 결정학자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DNA 결정 X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연극 제목인 <사진 51>은 프랭클린이 찍은 X선 사진 가운데서도 가장 선명한 사진이다. 프랭클린의 동료였던(공동연구를 하지는 않았다) 모리스 윌킨스는 이 사진을 몰래 빼내 복사해뒀다가 마침 그를 방문한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연구소에 있던 제임스 왓슨에게 보여준다. 당시 프랜시스 크릭과 DNA 구조를 밝히는데 혈안이 돼 있던 왓슨은 이 사진을 보고 DNA가 이중나선 구조임을  확신한다.

  놀랍게도 왓슨은 1968년 쓴 회상록 <이중나선>에 이 얘기를 노골적으로 쓰고 있다. 아무튼 그 덕분에 왓슨과 크릭, 윌킨스는 20세기 후반 최대 과학업적이라는 DNA 이중나선을 발견한 공로로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프랭클린은 4년 전인 1958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지만 만약 그녀가 살아 있었더라도 노벨상을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노벨상은 3명에게까지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남의 데이터를 무단으로 빼내 논문을 썼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논문 철회는 물론 과학자로서의 삶도 끝날지 모른다. 대중들이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그런 과학자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프랭클린 역시 연구 업적을 남성에게 빼앗기기 십상인 당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폐쇄적인 태도로 일관해 역사적 발견의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풋내기 과학자였던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을 발견한데는 시대의 영향도 컸다. 당시 구조생물학(생체분자의 구조를 밝히는 분야)의 최고 권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이었다. 그는 단백질의 구조를 밝혀 세상을 놀라게 한 뒤 관심을 DNA로 옮겼다. 그러나 미국에는 DNA 결정을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폴링이 1952년 봄 영국에서 열릴 한 학회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이때 DNA 결정 X선 사진을 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의 방문이 갑자기 취소됐다. 여권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당시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구소련에 극도로 민감했던 당시 미국 정부가 좌파인 폴링의 출국을 막았던 것. 지금 생각하면 어이 없는 결정이지만 그때는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조차 소련 스파이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왓슨은 책에서 만일 그때 폴링이 영국에 왔다면 심중팔구 그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혔을 거라고 쓰고 있다.

 

직류냐 교류냐 갈림길에서

 

  과학자들의 우선권 논쟁이 주로 불멸의 명성에 대한 집착이라면 공학자들 또는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기업가들은 우선권이 사업상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비슷한 기술 또는 오히려 좀 떨어지는 기술이라도 먼저 채택돼 어느 정도 규모 이상 퍼지면 그 뒤로는 더 나은 기술이 나오더라도 기존의 인프라를 좀처럼 뒤집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예가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을 직류로 할 것이냐 교류로 할 것이냐는 것. 19세기 말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은 직류로 전기를 보내는 방식을 만들었지만 송전 효율이 떨어지자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를 고용했고 그는 손실이 적은 교류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러나 테슬라는 에디슨이 약속한 보너스를 주지 않자 퇴사해 웨스팅하우스사에 들어가 교류 시스템을 상업화한다. 둘은 치열하게 맞섰지만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조명설비 입찰에서 교류 시스템이 채택되고 수년 뒤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을 송전하는 시스템 입찰에서도 교류 시스템이 승리하면서 결국 오늘날 우리는 교류 송전 시스템 아래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때 직류가 표준으로 채택되는 게 더 바람직했다. 직류는 교류보다 송전선이 덜 들어 배선이 단순할 뿐 아니라 같은 전압일 경우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일부 회사는 직류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미 확고해진 인프라를 뜯어고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품의 규격을 정할 때 우연 또는 즉흥적인 판단을 따르는 경우도 있다. 컴팩트디스크(CD)의 재생시간은 최대 74분이다. 공학자의 마인드라면 60분, 즉 1시간이 깔끔할 텐데 어정쩡한 74분은 뭔가.

  사실 1978년 필립스사에서 처음 CD 시제품이 나왔을 때는 60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휘자 카라얀이 그럴 경우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CD 한  장에 담을 수 없다고 지적하자 부랴부랴 규격을 바꾼 것. 그 결과 CD 크기도 5mm 커졌고 녹음시간도 74분 분량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산업계에서 규격 채택을 둘러싼 경쟁은 끝이 없다. 1970년대 처음 개인용 컴퓨터를 만든 회사는 애플이지만 1981년 IBM이 운영체제로 MS-DOS가 실린 PC를 내놓아 공전의 히트를 친 후 지금까지도 컴퓨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디자이너와 마니아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애플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만들어 재역전에 성공했다.

  새로운 플랫폼에서 MS는 사실상 전의를 상실했지만 구글이 안드로이드 체계로 스마트폰에서 애플을 제쳤고 이제 허니콤을 개발해 패드 시장에서 일전을 벼르고 있다. 물론 과거 PC의 역사가 재현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과학도 기술도 다수의 보통 사람들, 즉 대중의 정서에 따라 성패가 갈리고 운명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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