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들 신문은 사회적 소통의 매개체라고 한다. 덕성의 역사 91년 중 47년 동안 덕성여대신문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1964년 창간 이래 1980~90년대 학교와 함께 격동의 시기를 보냈으며 학내 민주화를 외쳤다. 창간 47주년을 맞아 덕성여대신문에 기록된 학내언론과 우리대학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1964년
1964년 신문이 처음 발행됐을 당시 월 1회 4면 배대판으로 발행됐다. 종로 캠퍼스 신관빌딩 1층 구석에 위치한 신문사에서 김정호 교수를 중심으로 학생기자 두세 명과 동판제작·삽화를 맡는 요즘으로 치자면 편집 디자인을 맡은 기자가 함께 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만든 신문이다 보니 초기에는 타 대학 신문을 많이 참고하고 타 대학 신문사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신문이 자리를 잡기 위해 우리대학 김정호 교수는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장 출신 한흥섭 씨와 함께 신문제작에 도움을 줬다. 이때 신문제작은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면 김정호 교수와 한흥섭 씨가 나머지 제작을 도와주는 식으로 진행됐다.
1965년
1965년 3월 신문 3호가 발행되면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1, 2호를 만들었던 선배들이 나가고 65학번 신입생 3명이 자리를 대신했다. 그 신입생들 중에는 우리대학 정기화(약학) 명예교수도 있다. 정기화 교수는 “당시 체계가 전혀 잡혀있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며 “그래도 기사를 쓰고 다른 대학 신문을 읽으며 전반적인 학문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 “기사에 ‘모택동 모자를 쓰고’라는 구절을 적었는데 취재원이 분노하며 항의한 적도 있다”고 당시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1971년&1975년
1971년 5월 4일, 여론면 장수코너 ‘구름재子’가 첫 선을 보였다. 우리대학 캠퍼스가 지금의 쌍문동이 아닌 운니동에 있던 시절, 운현궁 안에 학우들로부터 큰 인기를 끈 다방이 있었다. 당시 우리대학 학우들은 서울대, 연세대 등 타 학교 학생들과 사회·정치적 토론을 벌이는 토론장으로써 그곳을 이용했다고. 그 다방의 이름은 ‘구름재’로 현 여론면 코너 ‘구름재子’의 기획 및 작명 모티브가 됐다.
1975년 1월 20일에는 지령 100호를 맞아 ‘신문문학상’이 만들어졌다. 이는 현재 매년 창간을 기념해 현상공모하는 ‘학술문예상’의 전신이다. 첫 신문문학상에는 103개의 작품이 응모됐으며 3월 19일자 신문에 지금과 같이 우수작, 가작을 뽑아 심사평, 수상소감과 함께 실었다.
1980년대
또한 1987년 6월에는 반독재, 민주화를 염원하는 6·10 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와 시위대 학생들의 사망 등으로 사회에 많은 혼란이 일었다. 우리대학 학우들은 항쟁이 있던 시기에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가두로 나가 다 같이 투쟁했다. 결국 간접선거였던 대통령 선거제가 직선제로 바뀌며 시위는 마무리 됐고, 이듬해 2월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다.
1984년

1977년 시작된 ‘쌍문동 캠퍼스 마스터 플랜’의 일환으로 가정학과, 식품영양학과, 약학과, 제약학과가 먼저 쌍문동 캠퍼스로 이전했다. 이후 1984년, 중앙도서관을 신설하고 동시에 대학본부 및 전 학과가 모두 이전함으로써 우리대학은 쌍문동에 둥지를 틀게 됐다. 운니동에 있던 단과대학을 옮기면서 학과들이 새로이 개편되기도 했다.
1990년대
가장 최근에 있었던 발행 중지는 1997년 3월 10일이었다. 1989년과 1991년 있었던 투쟁이후 개선될 줄 알았던 환경이 오히려 악화된 상황이었다. 기자들이 주간교수, 학생처장, 교무처장, 사무처장, 기획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는 간부회의를 통해 신문 내용이 최종 결정됐던 구조에 대해 항의했고, 결국 신문 발행중지에 이른 것이다. 기자들은 ‘간부회의 심의 폐지, 주간교수의 역할축소, 기자에게 사설권 부여’ 이 세 가지 요구안을 제시했다. 투쟁이 얼마나 간절했고 격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당시 발행한 호외와 함성이라는 발간물이었다. 당시 학우들에게 나눠줬던 호외들에서 ‘호외 발행을 위한 모금운동 시행, 단식 ○일 째, 철야 농성 ○일 째’라는 문구들이 눈에 띈다. 결국 기자들과 대학, 주간교수는 합의점을 보고 9월 15일에 신문은 다시 발간된다.
1990년&1997년&2001년
1990년은 학내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다. 당시 신문 역시 재단문제, 언론탄압 등의 내용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1990년엔 성낙돈(교직) 교수가 사립학교법 교수재임용 제도의 첫 적용으로 재임용에 탈락했다. 하지만 재임용 탈락의 사유로 연구실적 등 교육의 문제가 아닌 교수의 품위 등을 문제 삼아 학내 논란이 일었다. 곧바로 ‘재임용 탈락 조치 철회를 위한 덕성학우 결의대회’가 열렸으며 장기간 총장실을 점거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1997년 한상권(사학) 교수가 특별한 사유 없이 재임용에 탈락한다. 게다가 이 사실은 교수 자신과 학우들에게도 개강을 하고 나서야 일방적으로 통보돼 학내에 적잖은 혼란을 불러왔다. 곧바로 천막농상이 벌어졌으며 장기간 총장실 점거사태까지 이어졌다.
2001년엔 재단 비리로 물러났던 박원국 전 이사장이 복귀했다. 박원국 이사체제가 제일 먼저 감행한 일은 ‘4명의 교수 임용탈락’ 처리였다. 많은 학우들은 울분을 터트렸고 오천 덕성인이 이뤄온 민주화를 한번에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반발했다.
2002년
차미리사 선생 동상과 함께 우리대학의 명물인 첼로 동상은 2002년 8월 26일에 주영숙(교직) 교수가 증정했다. 이 동상은 공부를 마치고 늦은 밤에 귀가하는 학우들에게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고.
2010년
지금의 ‘덕성여대신문’이 있기까지 많은 변천사가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2010년 3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작고 깔끔한 디자인의 베를리너판형으로 바뀌었다.

또 2000년 디지털시대를 맞아 덕성여대신문 홈페이지가 처음 제작됐다. 이후 2003년, 2007년 각각 새단장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홈페이지를 알리기 위한 광고 역시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