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의 기원과 역사
복지의 기원과 역사
  • 원석조 원광대 복지보건학부 교수
  • 승인 2013.03.1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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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교회가 담당하던 빈민구제는 엘리자베스의 구빈법을 기점으로 국가의 책임 범주에 들어갔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등 최근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복지’가 어떻게 탄생·발전해 왔는가의 역사를 통해 복지의 진정한 의미와 우리나라의 복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알아본다.

빈민구제는 곧 하늘의 뜻
  사회복지의 기원은 다양하다. 다시 말해 사회복지는 관념, 시설, 제도별로 그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빈민구제의 관념, 즉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와주라는 생각, 넓게 보았을 때 이타주의 관념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기록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다. 기원전 1750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은 자신의 법전에서 곤궁에 처했을 때 서로 도울 것을 명기하였다.
  이타주의 관념은 고대 유대사회, 그리스, 중국에서도 나타났다. 기원전 1200년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빈민과 취약계층을 도울 것을 원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기원전 500년 그리스 사회에서 ‘박애’란 인간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정의됐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시민들에게 돈을 희사할 것을 권장했고 요보호자를 위한 공익시설을 지어 음식과 피복 등을 제공했다. 기원전 300년경 중국에서는 유교정신에 의거 인간은 서로 의존해야 하는 사회적 존재로서 욕구가 있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예수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설파했으며 불행한 사람을 도울 것을 강조했다.

국가가 아닌 하느님의 사회복지시설
  가장 오래된 사회복지시설은 400년경 인도의 병원이다. 당시 병원은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시설이 아니라 빈민과 부랑자에게 거처와 음식물을 제공하는 집단 거주 시설로서 오늘날의 사회복지시설에 가까웠다. 유럽에서는 542년 프랑스 리용에 설립된 ‘신의 집’이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이었는데 인도의 병원과 기능이 유사했으며 성직자와 자원봉사자가 운영했다.
  세계 최초의 아동복지시설은 8세기 말 이태리 밀라노의 고아원이다. 787년 밀라노 시는 유기된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고아원을 설립했고 운영은 목사가 맡았다. 1084년에는 영국 캔터베리에 프랑스의 병원과 유사한 빈민과 장애인을 위한 구빈시설이 설립됐다. 유럽 최초의 자선조직은 1625년 프랑스의 벵상드폴 신부가 설립했다. 그의 자선조직은 빈민을 보살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후 유럽 가톨릭 국가에서는 교회가 국가를 대신해 빈민구제의 책임을 떠맡게 된다.

무소불위의 권위자가 지배하는 최초의 복지시설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사회복지시설은 17세기 중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설립한 ‘오피탈 제네랄(hopital general)’이 최초다. 오피탈 제네랄을 오늘날 용어로 번역하면 종합병원이지만 사실은 구빈시설이었다. 시설 내 의사가 있었지만 일주일에 두 번 회진하는 것이 다였으며 진료는 시설의 부차적인 요소였다. 오피탈 제네랄은 1656년 왕의 칙령에 따라 파리에 처음 설립됐다. 이 시설에는 건강한 사람, 병자, 불구자, 빈민 등 모든 유형의 걸인들이 수용되었다. 국왕이 임명한 종신직 시설장은 시설의 일반적 운영은 물론 행정, 상업, 경찰, 사법, 교정, 처벌 등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다. 시설의 부속건물에 감방과 지하감옥을 두고 입소자 중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감금하여 고문, 구타 등 가혹하게 처벌했다. 오피탈 제네랄은 재판 없이 실업자, 부랑자, 걸인 등을 처벌하는 사실상의 감옥이었다. 1676년 프랑스 국왕은 오피탈 제네랄을 모든 도시에 하나씩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구빈의 국가 책임을 인정한 엘리자베스
  현대 사회복지제도는 그 뿌리를 빈민구제에 두고 있다. 빈민구제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100년경 로마에서는 고위 귀족들이 모든 로마시민들에게 무상 또는 저가로 곡물을 제공했는데 이는 로마 사회의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313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교회가 빈민구제기금을 운영할 것을 권장했다.
  한편 대부분의 사회복지역사학자들은 1601년 영국 엘리자베스 빈민법을 근대적 사회복지제도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이유는 이 법이 세계 최초로 구빈의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법률로 명시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빈민법 이전에도 빈민법이 있었다. 1576년 빈민법은 근로능력 빈민과 근로무능력 요보호대상자를 구별해 전자는 교정원에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후자는 자선원에서 보호한다는 이른바 분류보호의 원칙을 확립했으며 구제가치가 있는 빈민과 구제가치가 없는 빈민을 구별한 것은 1349년 노동법까지 소급된다.

빈민구제란 황제의 인정(仁政)
  중국에서 재해 발생 시 국가차원의 빈민구제를 시행한 것은 그 역사가 유구하다. 이를 황정(荒政)이라 한다. 황정의 대표적인 예로는 흉년 시 국가 식량창고를 열어 구제하는 의창, 관청 비축미를 싸게 방출하는 평조, 감세, 부역 면제, 의료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조치들은 봉건시대 어진 정치(仁政)의 일환으로 농민의 생산능력을 회복하고 생산 의욕을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됐다.
  황정 중 역사기록으로 확실히 전해진 것이 상평창과 의창이다. 상평창과 의창은 창제(倉制)에 기원을 두고 있다. 창제는 전쟁에 대비해 군량미를 비축한 창고였는데 자연재해나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왕명에 따라 비축 양곡을 방출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제했다.
  기원전 54년 전한 선제 때 처음 설치된 상평창은 흉년 시 백성들에게 국가 보유 곡물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후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은 창고였다. 상평창은 풍년이 들어 시중 양곡의 가격이 쌀 때 매입·비축하고 흉년이 들어 양곡의 가격이 비쌀 때 비축 양곡을 방출하는 물가조절시스템으로 발전했다. 흉년 시 곡물을 빈민에게 대여해주는 구휼제도의 기능을 유지했지만 그 이자가 고리대금업이란 비난을 받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진정한 구휼제도였는지 의심이 간다. 의창 역시 창제에서 나온 것이다. 흉년이 들어 빈궁에 빠진 빈민에게 저리의 이자로 곡식을 빌려주는 제도였다는 점에서 의창은 확실한 빈민구제책이었다. 의창은 상평창에 비해 매우 늦은 시기인 수나라 양제 때 처음 실시됐다.
  그런데 서구의 사회복지학자들은 고대 중국의 이런 구휼제도들을 사회복지제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의성 때문이다. 중국의 황제들이 재해 발생 시 구휼을 실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실행이 법과 제도가 아니라 군주의 뜻에 따라 결정됐다. 군주의 자의에 의한 실시와 법률에 근거한 제도적 실시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중국의 황정과 영국의 빈민법을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난다.

  중국의 황정은 그 책임이 황제에게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것이었다. 황정에 관한 성문법도 없었다. 중국의 성문법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됐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진나라 상앙의 변법에서 출발해 수의 개황률(開皇律)과 당의 당률(唐律)을 거쳐 율령격식 등 매우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법률체계가 완성된 바 있다. 그러나 율령격식 어디에도 구휼에 관한 조항은 없다. 황정을 운영한 실무자도 지방관청의 관료로서 황정에 대한 전문성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구제내용은 곡물 위주의 단순한 현물급여에 그쳤고 재원에 관한 일관된 규정도 없었다. 반면에 영국의 빈민법은 구빈에 관한 지방정부의 책임이 법 조항으로 명시되었고 빈민법이란 성문법이 장기간 존재했으며 구빈감독관이란 시설 운영 전문가가 실무를 담당했다. 구제 내용도 시설보호와 현물 급여가 병행됐으며 재정도 일종의 목적세인 구빈세로 충당했다. 즉 영국의 빈민법은 단속적인 구휼이 아니라 구빈‘제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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