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은 무엇으로 사는가
폭군은 무엇으로 사는가
  • 함규진(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승인 2013.05.1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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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 입학한 다음, 또는 그 전에 ‘왕 게임’이라는 놀이를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모인 사람들 가운데 ‘왕’을 정하면, 그 왕이 지명하는 사람은 왕이 지시하는 일을 뭐든지 해야만 한다. ‘코로 맥주를 마셔’ ‘엉덩이로 이름을 써’ ‘서로 키스해’ 그 뭐라도 말이다.

  ‘왕’이란 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며,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므로 그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게임이다. 하지만 실제로 과거의 왕들이 그렇게 제멋대로 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가는 “그 말씀 거두어 주시옵소서!”부터 시작해서 반대와 저항이 끊이지 않다가, 끝내 쿠데타나 암살, 폭동과 민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보통이었다. 왕이 가장 높고 가장 강하다는 사실 뒤에는 그 지위와 권력을 모든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자리한다. 그런데도 나라와 백성을 상대로 ‘왕 게임’을 고집하던 왕들은 흔히 ‘폭군’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폭군에도 종류가 있고, 급수가 있다. 미치광이라서 폭군 노릇을 한 사람도 있고,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폭군이 된 사람도 있다. 알고 보면 다양한 폭군들을 성격별로는 대략 셋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약탈자 형’ 폭군이 있다. 이들은 마치 식당에 와서 행패를 부리며 자릿세를 뜯는 불량배처럼 자신이 가진 최고 권력을 철저히 사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만 쓴다. 전형적인 예로 로마의 제3대 황제 칼리굴라,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을 들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애써 다져놓은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은 칼리굴라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하며 온갖 해괴하고 부도덕한 짓을 일삼았다. 누이동생과 결혼을 선언했다가 그녀가 죽자 여신으로 받들었을 뿐 아니라 결혼식장에 난입해 신부를 강간하고 원로원 의원들의 재산을 제멋대로 몰수했으며, 정복왕의 영광을 얻겠다면서 출정해 외국인들이 아니라 로마의 서민들을 공격해서 그들의 목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결국 그는 암살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칼리굴라보다는 덜 무도했지만, 연산군도 한양 주변 곳곳에 ‘금표’를 세운 뒤 그곳의 백성을 내쫓고 사냥터와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방방곡곡에 채홍사를 보내 미인들을 뽑아올려 대궐과 문묘를 거대한 기생집으로 만들었다. ‘왕에게 불손한’ 말을 입 밖에 낸 사람은 예외 없이 처벌했으며 백성들의 뒷담화를 막고자 훈민정음까지 탄압했다.

  이런 자들은 잘 봐주려야 봐줄 데가 없는 폭군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래도 굳이 변명거리를 찾자면, 어차피 지배계층 전체를 약탈자 집단이라고 본다면 수만 명의 작은 약탈자보다는 한 명의 큰 약탈자가 낫고, 귀족들을 굴복시키려면 왕권의 절대성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연산군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아래가 위를 치받으면 세상이 망한다. 못된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런 변명이다.

▲ (왼쪽부터)로마의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흉상, 러시아의 이반 4세의 초상화,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의 흉상


  둘째, ‘일 중독자 형’ 폭군이 있다. 사소한 부분까지 꼬치꼬치 따져서 부하들을 못살게 굴고, 자기가 없으면 회사가 망하기라도 할 듯 설쳐대는 관리자가 있는데 그와 같은 기질의 군주가 폭군화되기 쉽다. 러시아의 이반 4세는 그로즈니, 즉 ‘공포’라는 별명을 역사에 남겼다. 그는 러시아가 너무 넓다 보니 정부를 우습게 보는 지역도 많고 보야르라고 불리는 귀족들이 황제의 코앞에서 보란 듯이 각종 전횡을 일삼고 있는 것에 분격, 수많은 보야르와 독립지향적 마을들을 파멸로 몰았다. 그가 키운 친위대로 전국을 뛰어다니며 암살과 살육과 방화와 약탈을 저지른 ‘오프리치니키’는 죽음의 천사들처럼 러시아를 공포로 몰아넣었는데, 그들도 국가가 안정되자 가차 없는 숙청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잔악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점이 칼리굴라와 이반 4세의 차이점이다. 그는 금욕적이었을 뿐 아니라 홧김에 황태자를 때려죽였을 만큼 가족에게도 용서가 없었다. 이반의 공포정치는 전설로 남았으나 그 덕분에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런 ‘잔혹한 축복’은 이반 4세를 존경했다는 스탈린이나, 박정희의 통치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국민을 철두철미 통제하고 채찍질하며 국가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누가 그런 세상에서 편안히 살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포퓰리스트 형’이 있다. 이들은 엘리트와 대중, 귀족과 서민으로 나뉜 세상에서 ‘다수의 약자’에게만 어필하려고 한다. 가령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 그는 ‘폭군의 대명사’로 오늘날에도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피 흘리는 일을 싫어했으며 말기에 기독교도와 일부 반역 혐의자들을 처형한 것 말고는 살육이나 숙청을 벌이지 않았다. 황제 개인의 과대망상을 충족해 주는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칼리굴라처럼 도덕률을 조롱하고 짓밟는 난행을 일삼은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그가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네로는 황제라는 자리가 로마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자리라고 여겼다. 그래서 화려한 볼거리를 많이 만들어서 로마 민중들의 각박한 삶에 즐거움을 주고 관중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뿌렸다. 로마의 숙적이던 파르티아에게도 평화를 제의하고 대가로 거액을 안겼는데, 이를 비난하는 원로원에게 ‘피를 흘리며 칼과 갑옷에 돈을 쓰느니, 그 돈으로 평화를 사서 축제를 즐기며 사는 게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서민의 고혈을 짜던 간접세 등을 대폭 폐지했고 관세를 없애 로마 서민들이 싼 농산물을 사먹을 수 있게 했으며, 노예도 주인을 고발할 수 있도록 법령을 고쳤다. 이 모두는 장기적으로 국가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정책이었고 귀족들도 그 점을 내세우며 네로를 비난했지만, 서민 대중은 그에게 폭발적인 갈채를 보냈다. 그래서 그가 말년에 저지른 몇 가지 실책을 빌미로 원로원에서 ‘국가의 적’으로 매도되고 마침내 암살되었지만 서민들은 오랫동안 그를 그리워했다. 귀족의 일원이던 역사가들의 편향된 기록에서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절대악처럼 보이는 폭군도 있고 선과 악의 판단이 헷갈리는 폭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주위에도 ‘폭군’은 있다. 우리는 스스로 폭군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주위의 폭군들에게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가 잘나서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아니다. 그가 없으면 조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인기만 끌면 그만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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