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서울의 정문, 숭례문
돌아온 서울의 정문, 숭례문
  • 장우진 기자
  • 승인 2013.05.13 1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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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3개월간 복구작업 끝내고 일반 대중에 개방

▲ 5년 3개월 간 복구작업 끝내고 일반 대중에 개방된 숭례문 ⓒ이은영 기자

  숭례문이 대중 앞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국보 1호 숭례문은 2008년 2월,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의 방화로 일부 소실됐다. 이후 5년 3개월간의 복구작업을 거쳐 마침내 제 모습을 찾았다.

  지난 4일 숭례문과 광화문 광장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숭례문 복구를 기념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일반 개방은 기념식이 끝난 오후 4시부터였지만 복구를 축하하고 숭례문을 직접 보기 위해 기다리는 시민들로 숭례문 인근은  이른 아침부터 붐볐다. 이렇게 많은 시민들의 발걸음을 이끈 숭례문은 어떤 존재일까.

  1396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축조된 숭례문은 남쪽의 성문이라 해 흔히 남대문이라고 불렸다. 한양의 성문 이름에는 각각 유가의 인의예지의 한자가 들어가는데 이 중에서도 숭례문은 ‘예(禮)를 숭상(崇)한다’라는 뜻을 갖는다. 숭례문은 일제강점기에 숭례문의 양옆 성곽을 허물고 도로를 놓기 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한양의 정문 역할을 했으며, 풍수지리상으로 도읍인 한양을 지키는 중요한 존재였다.

  숭례문의 현판은 사대문(숭례문, 숙정문, 흥인지문, 돈의문) 중 유일하게 세로로 쓰였다. 이는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씀으로써 문 아래를 눌러막아 한양 남쪽의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나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어 정확히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 현판 또한 2008년의 화재에서 소실될 뻔 했으나 화재현장에 있던 한 공무원의 기지로 불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현판은 복원된 숭례문에서는 예전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고 있다.
숭례문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됐지만 한때 상징성 부족을 이유로 국보 1호를 다른 문화재로 교체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국보의 번호는 관리의 편의를 위해서 국보로 지정된 순서에 따라 붙일 뿐 문화재의 가치를 줄 세우는 번호는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숭례문은 국보 1호 자리에 부족하지 않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숭례문은 백성들에게 국가 대사와 정책을 공지하고 중죄인을 처벌하는 광장의 역할을 하였으며 중국 사신을 접견하고 전송하는 주요 외교행사의 장으로 활용됐다는 점 등에서 사대문과 견주어 그 역사적,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복구가 끝난 숭례문은 매주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개돼 누구나 무료로 만나볼 수 있다. 다가오는 주말, 화상을 이겨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 한양의 정문을 찾아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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