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구와 구비문학 - 설화 자료를 중심으로
도봉구와 구비문학 - 설화 자료를 중심으로
  • 최진형(국어국문) 교수
  • 승인 2013.05.2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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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특히 지역문화 연구의 ‘관점’에 관한 심도있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지역문화 관련 자료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나 해석은 매우 긴요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주제를 본격적으로 감당하기에 앞서 도봉지역과 관련된 구비문학 자료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서 연구의 단초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도봉지역의 특성
  도봉지역은 여타의 지역과 변별되는 몇몇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도시 규모의 증감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분할이나 병합에 따라 매우 큰 유동성을 보인다. 이는 도봉구란 지역이 고정된 지역성 내지는 배타적 독자성을 지니기 어렵다는 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도봉구 또는 도봉지역은 서울과 지방 사이의 경계적 성격, 대도시와 중소도시 사이의 중간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터, 인접 지역과의 폭넓은 관련을 인정하면서 유연한 시각으로 접근할 때 그 특수성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도봉지역의 구비설화
도성과의 인접성이 드러난 설화
  도봉지역이 서울에 속하기는 하되 주변지역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도성과의 인접성’이 드러난 설화라는 항목을 마련해 보았다.

가) 옛날 안암동은 채소를 길러 이것을 문 안에 갖다 파는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다.
나) 안암동 남쪽에 안감내라는 개천이 흐르고 거기에 안감내다리가 있다.
다) 안암동에 안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라) 안감이 채소를 문 안으로 다 팔고 동대문 밖 주막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마) 어떤 점잖은 영감이 술을 먹고 술값이 없어 외상을 하려 했으나 주인은 욕을 하며 야단이었다.
바) 안감이 대신 술값을 내주자 자기 집을 알려주며 나중에 문 안에 들어오면 찾아오라 하였다.
사) 며칠 후 안감이 그 영감 집을 찾아가니 아주 잘 사는 집이었다.
아) 그 영감은 은공을 갚을 테니 소원을 말하라고 하였다.
자) 안암동은 동서로 개천이 있는데 비가 많이 오면 안암동이 섬처럼 되어 불편하기에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였다.
차)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던 영감은 다리를 놓아 주었고, 다리는 안감내다리로, 개천은 안감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안감내다리」, 『한국구전설화』 경기도편(서울, 이화종)

  「안감내다리」 전설은 성안과 밖, 즉 중심과 주변 또는 도심과 부도심의 관계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도성과 바로 인접한 마을에 존재하기 마련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특히 구체적 지형과 지명을 관련지어 볼 때 텍스트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는 점이 특성이라고 보인다.

가) 조선 성종대왕이 즉위하였을 때의 일이다.
나) 우리(구연자) 십칠 대 조 산소를 아리랑고개 신흥사 앞에 무덤을 만들었다.
다) 축회(築灰)하는 소리가 궐내에까지 들렸다.
라) 성종대왕이 궐내에 축회 소리가 들리니 불편하다고 하며 가오리(加五里)하라고 하였다.
마) 오리를 더 가서 미아리 인창학교 있는 곳에 묘를 썼다.
바) 이에 이곳을 가오리라고 부른다.
「가오리 마을 유래」, 『한국구비문학대계』 1-1
(도봉구 수유동, 이능구)

  「가오리 마을 유래」 역시 도성과의 인접성이 잘 드러나 있는 텍스트이다. 무덤을 만들 때 내는 회 다지는 소리가 궐내에까지 들렸다는 것에는 다소의 과장이 있어 보이지만, 미아리 지역이 도성과 매우 인접해 있음을 드러내는 데에는 상당히 효과적인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가) 도봉구 번동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 이태조 등극 후 중의 얘기를 듣고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다) 이태조는 뽕나무가 없어져야 대왕의 수가 늘고 왕위를 오래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라) 군사를 시켜서 만날 뽕을 치게 하였다.
마) 이에 칠 벌(伐) 자 벌리(伐里)란 이름이 생겼다.
「번동(벌리)의 유래」, 『한국구비문학대계』 1-1
(도봉구 수유동, 현이호)

가) 도봉구 방학동에는 하마들[下馬野]이 있다.
나) 하마들 뒷산에 덕수 이씨네 묘가 많은데, 조선시대 3대 정승이 살았다고 한다.
다) 덕수 이씨네 위세가 당당하여, 누구나 이 집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하마’라는 지명이 생겼다.
바) 또는 연산군 묘에 하마비가 있어, 그 앞의 둘을 하마평(下馬坪)이라고 한다.
「방학동 하마비」, 『도봉구지』

  「번동의 유래」와 「방학동 하마비」는 앞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도봉지역이 지닌 특성을 보여준다. 도성에서 직접적으로 행할 수 없는 일들이 도봉지역과 같은 도성 인접 지역에서 행해졌음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나무를 심는다거나 묘를 쓴다거나 하는 것, 또 그러한 행위의 결과가 도성에서의 삶과 끊임없이 연계된다는 점이 이 이야기들에 드러나 있다.

가) 영조대왕 때 금주령이 내려 장안에 술이 없어졌다.
나) 몇 달 지나지 않아 밀주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생겼다.
다) 왕은 선전관을 불러 5일 안에 범인을 잡지 않으면 벌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라) 선전관이 범인을 잡을 방도가 없어 고민하자 첩이 까닭을 물었다.
마) 첩에게 술을 못먹어 그러니 술을 구해오라고 하였다.
바) 얼마 후 첩이 술을 구해왔다.
사) 선전관은 첩에게 술을 더 구해오라 한 뒤 몰래 첩의 뒤를 밟았다.
아) 밀주 파는 사람을 잡아 왕에게 대령하였다.
자) 왕이 죽이려 하는데 그 처가 와서 대신 죄를 청하였다.
차) 99세된 시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밀주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카) 왕이 기특하게 여겨 금주령 어긴 것을 용서하고 효부라 하여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금주령과 효부」, 『한국구전설화』 경기도편(양주, 김양한)

가) 숙종대왕은 늘 야순(夜巡)을 돌았다.
나) 한 번은 저녁 때 어느 집에 가 보니, 상주는 춤을 추고, 여승은 노래를 부르고, 늙은 영감은 탄식을 하고 있었다.
다) 이유를 물으니 노인이 대답하였다.
라) 노인의 생일인데 형편이 어려워 생일상을 볼 수 없었다.
마) 며느리가 머리를 깎아 팔아서 음식을 마련하여 왔다.
바) 이 사실을 안 아들은 좋아서 춤을 추었고, 노인은 한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사) 숙종대왕은 아들이 별과에 응시하게 하고 시제를 “상가승무노인탄(喪歌僧舞老人歎)”으로 내었다.
아) 그 아들만 쓸 수 있는 답이어서 급제하여 잘 살았다.
「상가승무노인탄(喪歌僧舞老人歎)」,
『한국구비문학대계』 1-1(도봉구 미아동, 서안열)

  위에 든 이야기 두 편은 사실 도봉지역과 연관짓지 않아도 될 만큼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설화이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임금의 야순(夜巡)이 서울과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이뤄지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미복 차림에 수행원을 최소화하여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니 만큼 임금의 야순은 서울 도성 인근으로 한정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의 무대로서 도봉지역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우며, 역사적으로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금주령과 효부」 이야기와 유사한 텍스트로 『한국구비문학대계』 1-1의 779면 「금주령과 유진항」를 들 수 있으며, 「상가승무노인탄」 역시 임석재의 『한국구전설화』에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 해 준다.


여러 가지 연구 여건의 미비로 인하여 문헌 자료에 치중한 점은 본고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적 특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텍스트를 찾아내고, 거기에 나타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업이 좀더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도봉지역의 문화적 특수성이 해명되고, 나아가 지역문화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자료의 확보와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문화 연구센터 또는 도봉구 차원의 후원이 뒷받침 되는 가운데 체계적이고 치밀한 현지조사 및 자료 정리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연구 여건의 미비로 인하여 문헌 자료에 치중한 점은 본고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적 특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텍스트를 찾아내고, 거기에 나타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업이 좀더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도봉지역의 문화적 특수성이 해명되고, 나아가 지역문화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자료의 확보와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문화 연구센터 또는 도봉구 차원의 후원이 뒷받침 되는 가운데 체계적이고 치밀한 현지조사 및 자료 정리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위 논문은 2010년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제14집에 실린 논문 중 ‘도성과의 인접성이 드러난 설화’ 부분을 중점으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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