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사회’의 어떤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의 어떤 ‘운수 좋은 날’
  • 우찬제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9.16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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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리얼리즘 소설의 기반을 다진 작가 현진건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다진 현진건 소설가

  세련된 문장, 사실적 묘사
  현진건(1900~1943)은 1920년대 한국 소설사를 빛낸 탁월한 단편소설 작가이다. 조선조에서 역관을 많이 배출한 연주 현 씨 집안의 4남으로 1990년 8월 9일에 태어난 그는 11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여섯에 조혼했다. 결혼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외국어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와 이상화, 이상백, 백기만 등과 함께 동인지 <거화>를 간행했고 상해 호강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외국소설 번역 작업을 거쳐 1920년 <희생화>를 <개벽>에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본격화했고, 이듬해 <빈처>를 선보임으로써 문단에서 이름을 얻게 된다. 근대 초기의 많은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현진건도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소설 작업을 병행했다.

  1920년대에는 주로 단편소설을 창작했다. 초기에는 주로 고단한 식민지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우수에 빠진 지식인의 모습을 1인칭 고백 형식으로 그렸다. <빈처>(1921) <술 권하는 사회> (1921) <타락자>(1922) 등의 작품이 그러하다. 그러다가 <운수 좋은 날>(1924) <불>(1925) <사립정신병원장>(1926) 등에서는 3인칭을 도입하면서 좀 더 폭넓게 당시의 현실적 고난상을 그렸다. 그는 세련된 문장으로 사실적 묘사를 통해 리얼리즘 소설의 기반을 다진 작가였다. 1930년대에는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 등 장편소설을 썼고 1936년 <동아일보> 정간 때 구속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43년 4월 25일에 장결핵으로 타계했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지식인의 우수와 불안
  3.1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악화일로의 식민지 상황에 있던 1920년대의 지식인들은 문학 작품 속에서 세계와 자아, 식민지 현실과 자신의 처지, 돈의 식민화 현상과 자신의 궁핍 상황이라는 심한 갈등 속에서 좌절하고 냉소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지새는 안개> 등 일련의 현진건 소설들이나 <금반지> <조그만 일> 등의 염상섭의 작품, 나도향의 <17원 50전> 등 많은 소설들에 돈의 결핍 상황과 더불어 지식인의 불안과 침통한 우수와 냉소주의자의 딜레마가 제시되어 있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개벽』, 1921. 11)는 이런 1920년대 초반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의 절망과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아내는 지식인 남편에게 기대가 컸었다. 유학 간 남편이 명예와 돈을 한 몸에 지닐 수 있는 귀한 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던 터였다. 그러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영 딴판이었다. 돈도 벌지 않고 명예도 없으며 날로 술주정꾼으로 변모된다. 홀로 살림을 감당하는 자신을 무식하다고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남편의 처지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며 탓하기도 한다. 적잖이 실망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남편은 세상 탓만 한다. “이 조선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에 아내는 절망적인 어조로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탄식할 뿐이다.

  이렇게 아내는 잘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상황이지만, 사실 그것은 아이러니라고 봐야 한다. 지식인의 고난과 절망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많은 진술을 하지 않으면서도 좌절한 지식인상을 묘파하기 위해 작가가 사용한 서사 기법이 아이러니인 것이다. 아내와의 대화에서 남편의 말에 의해 간략하게 제시되고 있는 지식인의 좌절 상황, 거기서 우리는 나라 잃은 망국 상태에서 지식인의 실천적 지표를 상실한 채 부정적인 폐단 속에서 흔들리는, 그래서 술주정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당대 지식인의 우수와 절망의 모습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확실히 당대는 술 권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소설가 현진건과 함께 <거화>를 간행한 이상화 시인

  ‘운수 좋은 날’의 아이러니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개벽』, 1924. 6)의 주인공인 인력거꾼 김 첨지는 벌이가 시원치 않은데다 아내마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처지다.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김 첨지는 아내를 굶주려 병들게 하고, 병든 아내를 치료조차 못하는 비극적 상황이다. 그러다가 이 ‘운수 좋은 날’에는 모처럼 돈벌이가 잘 된다. 이에 김 첨지는 아내의 병을 돌보는 것보다도 실로 오랜만에 다가온 행운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기적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어한다. 돈이 ‘30전-50전-1원 50전’으로 점층적인 확대 과정을 거쳐 30원에 이르는 길은 돈에 대한 김 첨지의 욕망의 확대 회로요, 행운의 증대 회로인 동시에 돈 자체가 확대되는 회로이다.

  이러한 돈의 확대 회로에서 행운을 성취한 김 첨지는 일면 포만스러우면서도 이런 돈 때문에 고통 받는 자신의 실존적인 운명에 대해 술집에서 울분을 터뜨린다. “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하면서 풀매질을 한다. 행운의 상징처럼 받아들인 돈을 뿌리친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아이러니컬하지만 끊임없이 개인을 고통스럽게 소외시키는 돈의 현실을 향한 울분의 토로로, 푸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확대되던 돈의 행운 회로는 운수 좋은 일로 계속되지 않는다. 그 끝에 아내의 죽음이 제시됨으로써 불행의 급진적인 반전이 비극적 아이러니를 유발한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정작 아내가 설렁탕을 먹을 수 있을 때는 돈이 없다가 겨우 돈이 생겨 설렁탕이 생기니까 그것을 먹을 아내가 없는 것이나 살아서는 먹을 수 없었던 설렁탕을 죽어서야 받게 되는 것 모두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이와 같은 반전은 주인공의 의식을 짓누르는 심리적 다급함과 긴장 상태의 제시에서 이미 예비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이러니의 결구는 동시대의 주변인인 김 첨지의 운명과 상황을 더욱 모순적이고 비극적이게 한다.

  이런 비극적 아이러니는 상승일로에 있던 김 첨지의 돈의 회로를 급강하시키고 하강시킨다. 모처럼의 행운도 누릴 수 없는 노동 계층 현실의 비극적 운명을 아이러니를 통해 묘출함으로써 궁핍한 시대의 돈의 하강적 이미지를 날카롭게 드러내 보인 작품이 바로 <운수 좋은 날>이다.

  지금, 여기의 ‘운수 좋은 날’은?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초기의 현진건 소설은 주로 ‘술 권하는 사회’의 우수와 불안이 극화되었다. 지식인 남편과 무식한 아내의 어설픈 대조 또한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다. 불안하고 우울한 ‘나’의 이야기를 넘어서 폭넓게 현실을 성찰하고 고통의 바다로 나아갔을 때 현진건의 소설은 리얼리즘의 벼리를 알게 했다.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푸념을 넘어서 ‘술 권하는 사회’에서 ‘운수 좋은 날’을 갈구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좋은 운수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심오한 탐색의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의 어떤 ‘운수 좋은 날’의 풍경은 비단 1920년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현진건만의 과제일 수 없었나 보다. 지금 여기서도 그런 풍경들에 대해 여전히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현진건이 작품 활동을 전개한 잡지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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