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 94년생이 만난 94학번
응답하라 1994, 94년생이 만난 94학번
  • 정기자단
  • 승인 2013.11.1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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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아름답던 그때를 추억하다

  1994년 그 시절, 누군가는 태어났으며 누군가는 신문사에 청춘을 바치기도 했다. 94라는 숫자로 모인 우리들은 신문사로 하나가 되기에 충분했다. ‘민주언론의 선봉 덕성여대신문’을 외치던 양혜원(식품영양 94) 동문(이하 혜원), 정은이(경영 94) 동문(이하 은이)과 1학년 정기자들이 만나 신문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다.


94학번 정은이(좌),양혜원(우) 동문이 1994년도를 회상하며 지난호 신문을 읽고 있다.

 

  원영 : 선배님들의 새내기 시절이자 저희가 태어난 1994년, 그때가 궁금해요.
  혜원 :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재밌게 보고 있어요. 그때가 새록새록 떠오르더라고요. 드라마에서 보이듯 우리 세대는 X세대라 불렸어요.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했고 경제적으로도 훨씬 풍요로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유명한 서태지와 아이들과 삐삐도 유행하던 때였죠.
  은이 : 1994년 우리대학에 입학할 당시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입학을 하고 보니 교내에선 등록금 투쟁이 열리고 강의가 안 열리는 거예요. 내가 상상했던 대학의 모습과는 달라 충격적이었죠.

  민지 : 엄청난 포부를 가지고 신문사에 지원했을 것 같은데 지원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은이 : 신문사에 지원한 계기는 막연하게 학교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서 였어요. 신문사 면접을 보러 갔는데 지원한 동기들 모두 자기주장이 뚜렷한 친구들이더라고요. 이런 친구들이랑 신문사에서 꼭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혜원 : 저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기자라서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신문도 매일 봤어요. 오래 전부터 바라던 기자가 되고 정말 열정적으로 일 했죠.

  민지 : 그 당시 신문사는 지금과 다른 점이 많을 것 같은데 그때 신문사에 대해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은이 : 1학기 때 함께 신문사에 들어온 동기는 7명이었고 총 15명 정도의 기자가 있었는데도 취재가 많다 보니 많이 힘들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기사를 컴퓨터로 작성한다고 하는데 그때는 기사를 원고지에 직접 썼어요. 수업시간에 강의실 뒤편에 앉아 몰래 기사를 쓰곤 했죠.
  혜원 : 맞아요. 신문사에 컴퓨터 1대가 있었는데 컴퓨터를 쓸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신문 발행을 앞둔 주말에는 조판소에 가서 기사를 정리하고 편집했어요. 주말 아침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조판소에서 일하는 건 한창 놀고 싶었던 새내기 시절에는 참 힘든 일이었죠. 그래도 보람있었기 때문에 신문사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형 : 신문사 활동을 하다 보면 다양한 곳을 취재했을 텐데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취재원이 있는지 궁금해요.
  혜원 : 1학년 겨울방학쯤에 당시 우리대학 총학생회장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너무 예뻐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 총학생회장이 최근 문재인 캠프에서 일도 하고 유명한 정치인이 됐더라고요.
또 취재를 하러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러 갔는데 할머니들이 당신 딸에게도 위안부라고 말 안 했다면서 “일본이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 오겠다”고 하신 것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네요.
  아영 : 저도 수요집회를 취재하러 갔었는데 지금은 할머니들이 많이 안 계시더라고요.
  혜원 : 그때는 그래도 많이 살아계셨는데 마음이 아프네요.

  원영 : 저는 기사를 쓰고 나면 창피해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적이 많아요. 요즘말로 흑역사라고 하죠(웃음). 선배님들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사가 있나요?
  혜원 : 물론 그런 기사도 있지만 신문에 내 이름이 새겨진다는 것이 마냥 자랑스러웠던 것 같아요. 우리가 수습기자로 일 하던 때, 수습기자는 이름이 아닌 이니셜로만 실었기 때문에 처음 기사에 내 이름이 나왔을 때는 무척 신기했어요. 그래서 제 기사에 형광펜을 쳐서 다른 대학교 친구들에게까지 “이게 내가 쓴 기사야!”라며 보여주기도 했었죠.

  아영 : 저희는 타 대학 신문사와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한 점이 아쉬운데요. 그때는 타 대학과의 교류가 많았나요?
  혜원 : 전국대학생기자연합이 있어서 타 대학 신문사와의 교류가 활발했어요. 특히 성균관대신문사와의 교류가 가장 많았죠. 연합으로 취재를 하기도 하고 기사를 함께 만든 적도 있어요. 그리고 신문에 쪽지를 적어서 서로 교환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면 청춘남녀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생기기도 했었죠.
  은이 : 맞아요. 성대신문사 기자들과 우리 선배들이 워낙 친해서 자주 만났어요. 한 선배는 성대신문사에서 매일 잠을 청해서 아침마다 선배를 데려가라고 전화왔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웃음).

  지형 : 저는 수습기자 때 선배들께 혼난 적이 많은데 선배님들도 혼나신 경험이 있나요?
혜원 : 당연히 혼났죠(웃음). 선배들이 “빼!”라고 하면 기사를 고치거나 다시 쓰고 했어요. 모든 기사가 통과되면 같이 자장면을 시켜먹기도 했죠.
  은이 : 1학년 때는 선배들이 마냥 무서웠어요.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보니 선배들이 “기사 수정해라, 너는 이거밖에 못 쓰냐”며 혼내기도 하셨어요. 서러웠지만 혼나면서 많이 배웠죠.
  혜원 : 맞아요. 혼날 때는 많이 무서웠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즐거웠던 것 같아요. 동기들에게 웃으면서 “이 기사 선배들이 빼라고 하셨어”라고 말하고 같이 모여서 기사를 고쳐 썼던 기억이 나네요.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민지 : 신문사 생활을 하다 보면 남는 것이 많다고들 하는데 선배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혜원 : 신문사 시절을 돌이켜보면 추억할 거리가 많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에요.  사회에 나가기 전에 신문사라는 작은 사회생활을 했던 경험이 직장생활에 많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신문사 활동을 통해 책임감을 배웠어요.
  은이 : 나는 기자활동을 하면서 유명인을 만났던 것이 도움이 됐어요. 그 땐 좋은 인터뷰를 따내겠다는 일념 하에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그 분들이 가끔 방송에도 출연하더라고요(웃음).
또한 책임감도 많이 배웠죠. 한 번은 한 동기가 마감 때 네팔로 훌쩍 떠나버린 적이 있어요. 그때 우리가 그 친구 몫 까지 떠맡다 보니 무척 힘들더라고요. 이 일을 겪고 동기들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자고 다짐했죠.

  민지 : 후배들에게 ‘대학시절에 이것만은 꼭 해라’고 당부하고 싶으신 게 있나요?
  혜원 :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어떤 일이든 도전하라고 하고 싶어요. 당시엔 나름대로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서  많이 주저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대학생 때 해볼 걸’하고 후회가 많이 돼요. 인생은 길거든요. 친구들보다 뒤처질까봐 포기하지 말고 언제든지 꿈을 향해 도전하라고 전하고 싶네요.
  은이 : 그리고 돌이켜보면 당시엔 끙끙 앓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 게 아니더라고요. 대학교에 들어와서 젊음을 즐기는 건강하고 유익한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일을 하든지 돌아 봤을 때 후회되지 않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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