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도봉에서 다시 만나다
김수영을 도봉에서 다시 만나다
  • 이원영 기자
  • 승인 2013.11.1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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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에서 얻은 건강함을 시에 담은 도봉의 시인

  1950년대 말, 명동의 술자리에서 영구 집권을 꾀하던 이승만 독재정권을 향해 갖은 욕설을 하는 시인이 있었다. 동석한 작가들이 이를 제지하자 그는 민주주의 자유국가에서 욕도 제대로 못 하느냐며 오히려 말리는 사람에게 “네 작품이 예술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성 때문이다”고 비난한다. 그는 치열한 저항정신과 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으로 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이다.


  독재정권 아래서 자유를 외친 시인 김수영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 시인으로 평가받는 김수영은 초기에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쓰다 4.19혁명을 기점으로 독재정권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강조하는 시를 썼다. 사람들은 4.19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이 됐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4.19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벅차오르는 자유에 대한 느낌을 가누지 못해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정신은 우리에게 익숙한 <눈>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풀> <폭포>와 같은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줄곧 서울에서 살았지만 서울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종로구와 도봉구에 있는 2개의 비석이 그 흔적의 전부다. 2개의 비석 중 하나는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김수영 선생 집터’라고 소개한 비석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도봉구 도봉서원 앞에 있는 그의 시비(詩碑)다. 그의 시비는 어떤 이유로 도봉구에 위치하고 있을까. 그와 도봉구 사이의 인연을 알아보도록 하자.

 

(출처: 실천문학사)

 

  김수영과 도봉구의 인연
  1950년 6.25 전쟁 시기,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강사를 하던 김수영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돼 이북으로 끌려간다. 그 후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돼 남하한 그는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돼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그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는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54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가족과 재회한 그는 1956년 마포 구수동으로 아내와 함께 분가한다. 당시 아버지와 사별하고 혼자 남은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의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도봉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생계를 위해 양계를 시작하는데 그때 김수영 시인은 구수동과 도봉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양계를 도왔다. 그 역시 생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구수동에서 닭과 돼지를 기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 평전>에서 그의 동생 수성은 김수영이 도봉산에서 양계와 작품 활동을 하며 커다란 기쁨을 얻은 것 같다고 회고한다.

“형은 우리 집에서는 생산적인 존재가 아니라 소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형은 병아리를 기르면서 어머니보다 더 지극한 정성을 쏟았어요. 어머니와 형은 서로 ‘이제 그만 쉬어라’, ‘어머니가 먼저 들어가 누우세요’하고 말했지요. 그 때 우리는 밤에는 산란이 떨어지니까 밤에 불을 켜놓고 닭을 길렀는데, 직장에서 돌아와 밥을 먹고 닭장으로 나가면 형은 열이면 열 꼭꼭 따라 나와 도와줬어요. 저 분은 글과 양계를 위해 태어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1956~7년 무렵인데 하루는 형이 ‘나 오막살이 방 하나 지어줄 수 없겠니’하더군요. 부탁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오죽하면 그러랴 싶어서 좀 떨어진 서쪽 끝에다 방을 하나 지어드렸죠.”

  그의 형제들 말에 따르면 김수영은 선산이 있고 어머니의 농장이 있는 도봉산 골짜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글을 쓸 적이면 언제나 쓸 거리를 들고 도봉에 왔다고 한다. 수성은 6.25때 타 없어진 문서들을 새로 작성 할 때 선산 명의를 형의 이름으로 해주었다. 글 쓰는 사람이 저만한 산이라도 소유하고 있으면 그 산이 그의 마음으로 들어와 정서를 보다 풍부하고 윤택하게 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대학 이명찬(국어국문) 교수(이하 이 교수)는 “1957년을 전후한 김수영 시의 성과로 <눈>과 <폭포>를 꼽는다”며 “이 작품들로 그는 한국시인협회가 제정한 시협상의 제1회 수상자가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성과는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전에 없는 건강함에 힘입은 바가 크다”며 “<폭포>에서 부정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고매한 정신’의 출현을 기다리는 그의 건강성은 도봉산에서 머무를 시기 양계로 인한 생활의 안정, 가족 관계의 회복, 자연과의 만남에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폭포 中>

  또한 이 교수는 “1957년 작 <풀>에 이르기 전 김수영의 시 정신은 <거대한 뿌리> <사랑의 변주곡>에 와서 거의 완성에 도달한 것 같다”며 “그 사이에 <신귀거래>라는 연작시가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신귀거래2-격문>에서 도봉산에 온 후 도회에서의 모방과 증오, 굴욕을 벗어버리고 농부의 몸차림을 하고서야 ‘진짜 시원한 자유’를 얻게 됐다고 말한다.  

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
인제 정말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
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
이건 진짜 시원하고
이 시원함은 진짜이고
자유다
<신귀거래2-격문 中>

  도봉구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김수영
  1969년 김수영의 사망 1주기를 맞아 그의 문우와 친지들은 도봉산에 위치한 묘 앞에 시비를 세웠다. 시비에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불세출의 득의작인 <풀>의 한 부분이 시인의 글씨로 새겨져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시비는 현재의 자리인 도봉서원 앞으로 옮겨졌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풀 中>

  이와 더불어 오는 27일, 흩어져있던 그의 흔적은 김수영 문학관이 개관하면서 한 자리에 모인다. 도봉구청 문화관광과 인제형 담당자는 “김수영 시인과 도봉구의 인연을 알려 관광객을 유치하고 주민들에게 쉼터와 문학 활동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문학관을 개관하게 됐다”며 “방학3동에 위치할 문학관에 시인의 육필 원고, 저서, 김수영론 관련 자료, 시인의 작품이 포함된 서적과 김수영 문학상 관련 자료, 시인의 애장도서나 애장품 등을 전시할 계획이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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