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학술-미국 남북전쟁 이전시기 노예제도와 젠더체계
영화로 보는 학술-미국 남북전쟁 이전시기 노예제도와 젠더체계
  • 이창신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 승인 2014.09.15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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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화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2013)>

영화 <노예 12년>에서는 백인 농장 주인에게 착취를 당하는 팻시라는 여성노예가 등장한다. 팻시는 육체적 노동을 할 뿐만 아니라 농장 주인에게 강간과 같은 성적착취를 당한다. 이러한 모습은 팻시를 포함한 당시 여성노예들에게 빈번하게 발생하던 일이다. 그렇다면 당시 여성노예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아보자.



노예 결혼제도와 가정에 있어서 젠더체계
  미국의 노예제도는 미국 역사상 남북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남북전쟁이라는 최대의 비극을 불러왔다. 흑인 남성노예와 여성노예들은 삶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는 점을 비롯해 많은 경험을 공유하였지만 노예제도는 젠더체계의 관점에서 볼 때 큰 차이점 또한 존재하였다.

  17세기-18세기 초 대농장 정착기에 여성노예는 남성노예 보다 경제적 가치가 낮게 간주되었고 노예주들은 이들의 출산능력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오면서 농장주들은 여성노예들의 출산으로 인한 잠재적 이익을 깨닫게 되었다. 노예주들은 재산 증식이라는 목적을 위해 여성노예들의 임신을 강요하였으며, 여성노예의 삶에 있어서 임신과 자녀양육은 매우 중요한 의무가 되었다(Stampp, 1956: 110).

  노예들의 결혼풍습은 일반적으로 부부가 함께 거주하는 형태와 노예제도만의 독특한 결혼제도였던 농장외 결혼(abroad marriage)이 있었다. 농장외 결혼이란 다른 장소에서 거주하는 노예들 간의 결혼을 의미하였다. 농장외 결혼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많은 부부가 이런 관계를 원하였는데 그 이유는 배우자의 학대받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노예들의 결혼은 당시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하는 사실혼 관계였다. 따라서 노예가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법적으로 호소할 근거가 없었다. 노예가정은 빈번한 해체를 경험해야 했다. 예를 들어, 농장주의 파산이나, 상속문제에 얽힌 재산분할이 필요할 경우 등이 이에 해당되었다. 노예가정은 매우 불안정한 관계였기 때문에 실제의 혈연관계가 아닌 지연관계로 형성된 친족의 형태가 발전하였고, 공동체 상호 간에 서로 의무를 느끼면서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흑인 노예들의 부부관계는 백인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였다. 사실혼에 입각한 결혼관계 속에서 흑인 여성노예들은 결혼생활에 있어 보다 독립적일 수 있었다. 또한 남성과 여성노예들은 다 같이 농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으며, 남성노예들의 경우 가정 내에서도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누릴 수가 없었다.

  노예사회에서 흑인 여성의 역할은 노예주에 의해 강제로 부과된 노동과 가족을 위해 하는 가사노동이 있었다. 여성노예가 짊어진 짐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여성이 지는 이중의 노동을 극단적으로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흑인 여성노예의 경우 농장에서는 남성과 동일한 노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생산자로서의 역할로 인해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음을 의미하였다.

젠더로 본 노예의 성문화와 성적착취
  일반적으로 당시 백인사회와는 다르게 노예제도 하에서 어린이들의 세계는 성별에 따라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소년과 소녀들은 대부분 같이 지냈고, 놀이나 노동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성별구분에 의한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장차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일하게 되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성장해서 동일하게 농장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소년들과 소녀들이 12세에서 16세가 될 때까지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동안 그룹을 형성해서 일을 하는데 이를 ‘트래시 갱(Trashgang)’이라 불렀다. 트래시 갱에 참가하는 경험은 소년들보다 소녀들에게 더 큰 전환점이 될 만한 경험이 되었다. 그룹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임산부나 나이가 많은 여성노예, 또는 유아와 함께 노동하는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소녀들이 온전히 여성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트래시 갱’은 소녀들에게 노예제도 하의 삶의 여러 경험들 즉 남성, 결혼 그리고 성에 대해 터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Olmsted, 1971:152).

  여성노예들은 일반적으로 사춘기를 갓 지난 15세나 16세쯤 임신을 하였다. 빅토리아의 관습에서 정조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백인 소녀들과는 달리 흑인 노예 소녀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성문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결혼을 한 후에는 비교적 절제된 성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적 절제는 때때로 농장주의 성적착취로 인해 무너졌다.

  통계에 의하면 남북전쟁 이전시기 출생률은 1000명당 50명을 초과했는데 15세에서 44세 그룹 여성들의 1/5이상이 매년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통계는 남북전쟁 이전 노예제도에서는 남녀 노예의 기능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흑인 남성노예들은 주로 노동을 담당했던 것에 반해서 흑인 여성노예들은 노동의 재생산을 위한 임신, 출산, 양육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흑인 여성노예들의 출산기능을 생산의 차원에서 중시하는 경향은 대부분 농장주들의 성적착취를 불러왔고, 이러한 여성노예들에 대한 성적억압은 그들의 결속과 다양한 저항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White,1985: 68-69).

흑인 여성노예들 간의 자매애와 저항
  미국 역사에 있어서 노예들의 저항은 집단적 형태보다는 개인적 차원의 저항이 더 흔한 유형이었다. 흑인 여성노예들은 성적 절제, 피임, 낙태 그리고 유아살해와 같은 방법들로 성적착취에 직접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들이 이러한 저항을 선택한 이유는 자식에게 노예의 처지와 고통을 남겨주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이고, 주인에게 재산 증식을 시켜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이러한 저항 행위들은 모두 백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 것이었고, 소수의 흑인 여성노예의 도전적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개인적 저항 이외에 일상생활에서 그들만의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자매애를 키워가기도 하였다. 여성노예들은 농장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한 후에도 가정에 돌아와 가족을 위한 가사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여성들은 그들 스스로 삶의 지혜를 발휘해야만 했다. 여성들 사이의 연대는 그들이 생존을 위해 방법을 모색한 결과였다. 여성들은 함께 식사하고 노동가를 부르며 서로의 처지를 동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흑인 여성노예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자매애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남부 대 농장 생활에서 형성된 생활방식이었고 이로 인해 그들의 여성성과 서로 간의 결속은 더욱 강화되었다(Olmsted,1856:430-432).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노예여성들은 그들만의 질서의 기준을 형성하였다. 어떠한 분야에 재능을 가지고 탁월한 기술을 가진 여성이 대체로 지도자 역할을 하였고, 이러한 기술은 가족을 통해서 전수되었다.

  흑인 여성노예들은 자매애를 바탕으로 한 상호의존 관계를 통해서 노예 사회내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여성 간의 결속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고 저항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남북전쟁 이전시기 흑인 여성노예들은 경제적, 생물학적 구조가 결합되어 삶 자체가 매우 복잡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이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젠더체계를 초월한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이러한 모든 과정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본 논문은 2010학년도 덕성여자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이 글은 이창신 교수가 2011년 12월 발행된 한국아메리카학회의 학술지 『미국학 논집』에 게재한 논문 <미국 남북전쟁 이전시기 노예제도와 젠더체계> 를 일부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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