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학술]머나먼 독일, 그리고 그들의 삶
[영화로 보는 학술]머나먼 독일, 그리고 그들의 삶
  • 나혜심 성균관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5.05.18 1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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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영화 <국제시장 (Ode to My Father, 2014)> 
  덕수는 ‘선장’이 되길 원하지만 공부 잘하는 남동생을 위해 본인의 꿈을 접고 파독 광부가 돼 동생을 뒷바라지한다. 독일에서 고되고 힘든 타지 생활을 하던 덕수는 한국에서 독일로 오게 된 간호사 영자를 만나게 된다. 이후 둘은 서로를 위로하며 타국생활을 한다. 그렇다면 1960년,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머나먼 독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개발 속에서 시작된
  “파독”의 역사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몇몇 예술작품들로 인해 최근 1960-1970년대 “파독” 한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인용부호를 사용한 이유는 파병처럼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가가 보낸 것이라고 알려진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간호 인력과 광부를 포함해 단순노동자나 기술교육생 약 2만여 명이 이동한 이 역사는 규모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데 그 근간에는 그들의 송금과 경제적 근대화, 그리고 당시 국가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 이 역사는 1950년대 독일 가톨릭 사제들이 간호학생과 공장 기술실습생을 중개하면서 시작됐으며 한·독 양국의 각기 고유한 배경과 국제적 관계, 그리고 개인의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이 결합된 과정이었다. 

  광부들이 독일로 가게 된 계기는 1960년 후반 독일에 마샬플랜 지원국인 미국의 제안이 직접적이었고 당시 한국이 국제노동기구에 가입돼 있지 않았던 까닭에 광부는 기술실습생으로 출국했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의 간첩단 조작사건인 동백림사건의 발생으로 잠시 중단됐다가 다시 재개돼 1976년까지 이주가 진행됐다. 

  지금도 독일은 직항으로 약 11시간을 비행해야 하는 거리이고 언어, 문화적 상이함을 가졌기 때문에 독일까지 한국의 노동인력이 이동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 이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인과관계가 있다거나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인식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호황을 누리는 선진공업국의 필요와 이곳에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일정한 이해를 추구하려던 일상 속에 파독 광부들이 있었다.

1970년대 독일에 있는 성 요하네스 병원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간호사들이다. 이들은 고학력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잘 적응해 나갔다. 출처/딴지 일보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 후 피폐한 사회·경제적 상황과 쿠데타 이후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에는 상황이 매우 열악했다. 개항 이후부터 선교와 의료적 지원국이었으며 하와이 이주 및 사진 신부의 역사,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원조를 진행하던 미국은 당시 한국 젊은이들에게 핑크빛 희망의 국가였다. 따라서 기회가 주어졌던 독일은 그 대안으로써 가고 싶은 나라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노동력을 상실하고 마샬플랜 속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을 경험하고 있던 독일은 일할 사람이 부족해 1955-1973년 사이에 외국인의 취업을 유도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는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가 이전되는 상황 속에서 광산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그러나 일시에 정리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산업이었고 매우 불안전한 고용조건으로 인해 독일 국민 대신 이를 감당해줄 단기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국가적 협정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 알선을 통해 홍콩, 필리핀, 한국은 물론 모리셔스, 에콰도르 등의 노동자들이 독일로 떠났다. 이와 같은 외국인 단기노동자 고용은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물론 미국이나 그 이외의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진행하고 있던 것이었고 그 과정 안에 한국인의 소위 “파독”의 역사가 있었다.

1960년대 파독 광부들은 머나먼 타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시커먼 재를 뒤짚어 쓰며 일을 한다. 사진 캡쳐/영화 <국제시장>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국경을 넘는 취업에 과감하게 뛰어든 개인들이다. 한국에서는 직장을 얻을 수 없었던 이들부터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이들,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 했던 여성들,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이들까지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사회적, 경제적 차이 속에서도 전반적으로 가난했던 한국 땅을 떠난 이들이 독일에서 부유함을 경험하면서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을 지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기에 이들의 송금은 큰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오로지 가난 때문에 이들이 외국으로  향했다라고 일반화시킬 수는 없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경력 있는 광부를 원했지만 대부분은 중졸부터 대졸까지의 다양한 학력과 교사에서 실업자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비광부들이었다. 단기 교육 후 독일에서 그들은 비교적 기계화돼 있었지만 자신들과 확연하게 체구가 다른 이들이 사용하는 기계와 의상과 도구 속에서 고된 일상을 경험했다. 주로 광산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단체생활을 했던 광부들은 드물지 않은 사고로 죽거나 다치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열심히 삶을 지속해야 했다. 3년 계약의 연장 불가인 조건 속에서 대부분은 계약이 끝난 이후에도 다른 일자리를 찾아 삶을 이어갔다. 

  한국과는 다른 간호문화에
  적응해갔던 한국 이주자들
  선진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신문에 보도되는 일도 있었던 간호학생, 면허간호사, 간호조무사의 이주는 의료에 대한 요구 증대와 노인 요양수요 증가 속에서 진행됐다. 이들은 병원은 물론 양로원, 결핵 환자나 정신병자 수용시설 등 다양한 곳으로 배치됐다. 병동이 폐쇄되고 환자가 복도에 있어야 할 만큼 간호인력 부족을 겪던 독일에 간 이들은 도착 다음 날부터 일을 했다. 그것은 독일 간호의 특수함으로 가능했다. 영미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간호문화가 시작되고 그 전통 속에서 간호전문학교, 간호대학을 거쳐 의료적인 처치를 하던 한국의 간호문화와 달리 독일에서는 환자 회복을 돕는 일상의 돌봄, 즉 간병과 유사한 일들이 간호였다. 씻기기, 식사 제공, 배변 도움은 물론 각종 청소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는 좌절을 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돕기 위한 한국 정부의 제도적 지원은 없었다. 다만 독일 종교기관에서 고용한 사회복지사들이 이들을 도왔다. 그러나 모든 한인이 그 존재를 알거나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의 이주자들과 달리 고학력이었던 한국 이주자들은 잘 적응해 나갔고 일부는 계약 만료 후 귀국을, 일부는 미국이나 다른 유럽국가로 재이주를 했으며 일부는 체류권리 투쟁 끝에 독일에 남았다. 

  차관담보설이 유행했지만
  확대 해석은 옳지 않아
  언제부터인지 한인 이주가 1961년에 한독 간 차관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받을 차관에 대한 담보로 시작됐고 그래서 그들의 인신과 임금이 억류됐으며 그들의 돈은 고속도로 건설 등에 쓰여 경제적 근대화의 기반이 됐다는 담론이 유행했다. 차관협상단의 일원에서 나온 이 이야기에는 1964년 방독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 추가된다. 대통령의 차관 요청 방문과 이주자들 앞에서의 연민의 눈물이 언급되고 이는 희생자(담보)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이 둘은 조국 근대화의 기반으로 해석된다. 결국 그 대통령의 정치, 사회적 과실은 국가를 위한 희생 앞에서 언급할 기회를 잃게 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역사는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과 양국의 목적 사이에서 진행된 단순한 이주노동의 역사였다. 그들의 임금은 담보된 바 없고 당시 한국의 청계천 등의 모든 산업현장에서 일한 이들의 역할과 다른 바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에 대한 빚은 잊어서는 안 되지만 그 이상의 의미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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