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학술]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가르치다, 미국의 배심재판
[술술 풀리는 학술]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가르치다, 미국의 배심재판
  • 조성자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승인 2015.10.0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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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 (12 Angry Men.1957)>
  18세 푸에르토리코계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기소됐다. 소년이 무죄일 것이라고 믿거나 무죄를 바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두 명의 목격자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모든 증거는 그를 유죄로 몰아갔다. 빈민가에서 태어나고 몇 번의 폭행 전과 기록도 있는 피고는 유죄 판결을 받으면 사형을 당해야 하는 1급 살인자다. 6일간의 재판을 거쳐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피고인의 범죄 사실에 ‘합리적인 의심이 없다(beyond reasonable doubt)’고 판단이 서면 피고를 유죄로 판단하되, 유죄 판단은 만장일치여야 한다”는 지침을 준다. 지루한 표정으로 무미건조하게 지침을 읽어 내린 판사가 배심원들이 평결을 내리도록 그들을 작은 방으로 들여보내면서 이 영화는 시작된다.



  12명이 빼곡히 둘러앉아야 되는 타원형의 탁자가 전부인 답답한 작은 방. 한 쪽 벽에 달린 선풍기는 작동되지 않아 이마에 땀이 흘러내리는, 습하고 더운 한여름의 방은 이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피고의 성장환경으로 봐서 유죄가 틀림없다고 단언하는 다혈질의 장년 남자, 서너 시간 후에 시작되는 야구경기 표가 있어 그저 빨리 이 방을 나가고 싶어 욱욱거리는 중년의 남자, 무더운 날씨에도 말쑥한 정장에 흐트러짐이 없는 딱딱한 표정의 증권맨, 부동산 사업으로 바쁘다며 짜증내는 사업가, 슬금슬금 목소리 큰 사람의 눈치를 보는 소심한 남자, 팔십이 넘은 노인 등 12명의 배심원은 연령, 직업, 계층에서 다양한 우리사회를 대변하고 있다. 그저 빨리 이 방을 나가고 싶어 하는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당연히 유죄 아니냐며 만장일치의 유죄 평결을 유도하는 거수 표결을 제안한다.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모두 다 손을 올리는 것 같은데, 결과는 11 대 1! 

  우리들의 재판,
  주체로서 사건 바라보기 
  유죄 판단에 동의하지 않은 단 한 사람. 말쑥한 흰색 정장 차림의 건축가, 8번 배심원이다. 당신 제정신이냐며 비난을 쏟아내는 11명에게 그는 ‘잘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살해에 사용된 칼이 피고가 살던 동네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증인인 80대 노인이 피고가 범행 후 달려 나가는 것을 봤다는 시간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 평상시에 안경을 쓰는 또 다른 증인이 피고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가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은 안경을 쓰지 않아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점 등을 의심한다. 사건을 함께 재구성해 나가면서 배심원들은 한 명 한 명씩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증거, 증인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 모든 증거와 증언이 피고가 살인범이라고 단언하고 무죄일 수도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판사, 검사, 변호사, 목격자들의 무관심과 무능함이 만든 틀 속에 있다가 서서히 간과한 사실들을 찾아내면서 피고의 알리바이는 새롭게 조명된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 보이지 않았던 사건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홀로 사건을 의심한 8번 배심원은 ‘배심재판을 시간만 잡아먹는 귀찮은 일이다’ 라고 불평하며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18세 젊은 청년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다른 배심원들을 지적한다. 이는 개개인의 편견, 선입견, 심리적인 성향 등이 배심원들의 판단을 얼마나 좌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그런 불량한 애들은 내가 아는데 다 뻔해!’, ‘검사와 목격자가 얘기하는 걸 보니 유죄인 것 같은데요?’, ‘다들 유죄라고 얘기하는데?’, ‘유죄든 무죄든 상관없어, 그저 빨리 나가기만 하면 돼!’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재판을 받는다면 지금처럼 하겠느냐”며 주체로서 사건을 바라보기를 촉구한다. 그런 한 사람이 여럿의 양심을 건드리면서 ‘우리들의 재판(peer trial)’이라는 배심재판은 본래의 자리를 찾는다. 

  지배자에서 벗어나
  시민의 힘으로
  1607년 미국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은 최초의 성공적인 영국 식민지로 개척된다.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찾아 이주한 이민자들은 미국 동부해안에 정착하고 식민지는 확대된다. 그러나 식민지로서 대표권도 없이 가혹한 세금과 압제에 시달리던 동부 13개 주는 1776년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왕에 대항해 독립전쟁에 들어간다. 식민지 독립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영국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 7년 후인 1783년 드디어 영국은 파리조약에서 미국의 식민지 독립을 인정한다. 독립국가로서의 결속과 안정을 위한 노력은1787년 미국연방헌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는데, 이 연방헌법 제3조 2항 3절은 ‘모든 재판은 배심재판 이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1776년 미국독립혁명의 기치였던 자유와 평등, 1779년 프랑스대혁명의 이상이었던 자유, 평등, 동지애는 당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유럽 지성들의 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유는 폭압적인 절대왕정을 향한 절박한 요구였다. 영국 왕의 압제에서 독립을 성취한 새로운 국가 구성원들에게 공통의 이익을 대변할 연합체는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방의 형태를 취하는 새로운 정부가 과거 자신들을 압박했던 왕을 대신해 다시 압박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 보통사람들의 의지가 연방헌법 제3조, 사법권 규정에 ‘모든 재판은 지배자가 임명한 판사가 아니라 자신들이 참여해 평결하는 배심재판이어야 한다’는 타협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연방정부가 자리를 잡은 후에도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과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1791년 수정헌법을 제정하면서 첫 10조항이 권리선언이라 부르는 ‘기본권’에 대한 규정으로 제정된다. 수정헌법 제6조는 ‘공정한 배심원에 의한 신속한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수정헌법 제7조는 ‘다투는 금액이 20달러를 넘는 소송에서는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며 배심원이 판단한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이를 재심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최근 실효성 논란 일었으나
  그럼에도 가치있는 배심재판
  미국 헌법 제1조 2항에 따라 1790년 실시된 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미국의 인구는 3,929,214명이었고 2015년 9월 30일 인구시계에 의하면 현재 미국의 인구는 321,848,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현재 인구수에서 100분의 1만큼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1790년대 미국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지키고자 했던 배심재판의 권리와 의미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이 변질되고 찬반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비록 오십여 년 전이기는 하지만 배심재판이 희망이고 정의라는 미국인들의 의식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토크빌은 “배심재판은 시민들에게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가르친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논란이 될 때마다 배심재판제도의 도입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기됐다. 현재는 2008년 국민참여재판제도가 도입돼 8년째 시행 중이다. 그동안 시행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법이 나를 통치하고 나는 그저 적용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법에 참여하고 주체가 돼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모든 비용, 노력, 투자는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18세기 새로운 국가를 만든 미국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지키고자 했던 가치이고 21세기를 사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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