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근화여학교 교훈의 의미는?
[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근화여학교 교훈의 의미는?
  • 한상권(덕성 100년사 편찬위원장)
  • 승인 2018.05.1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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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화여학교 교훈
  교훈에는 학교의 교육이념이 압축돼 있다. 교육기관의 교육철학의 정수가 배어있는 것이다. 교훈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는 건학이념을 창조적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그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출발점이 된다. 독립운동가이며 여성운동가인 덕성학원설립자 차미리사(1879∼1955) 선생은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이어받아 1920년에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여성교육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전국순회강연을 통해 “여자도 사람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요,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첫째 알아야 되겠고 배워야 하겠다. 남자의 노리개 남자의 노예 노릇을 하던 케케묵은 시대는 벌써 지난 지 이미 오래이다”라고 부르짖어, 여성들로 하여금 인격에 눈을 뜨고 자아를 확립할 것을 강조했다.

  차미리사 선생은 사회교육기관인 근화학원을 1925년에 정규교육기관인 근화여학교로 승격시킨 후, 교훈을 “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二.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三.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로 정했다.

  근화여학교 교훈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는 삶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는 사고의 독창성을,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는 지식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근화여학교 교훈에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를 강조하는 1920년대 시대정신이 압축돼 있는데, 이는 주체적 존재로서 본래적 자기의 삶을 강조하는 실존주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주체성이 진리이고 주체성이 현실이다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existence)을 중심개념으로 하는 철학적 입장을 실존철학이라고 부른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유한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인간을 주체적인 자각으로 이끌려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입장 중 하나다. 실존철학에서 ‘실존’이란 인간의 본래적 자기를 일컫는 개념이다. 일상적이면서 세속적인 비 본래적 자기 존재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기에로 비약 복귀하는 존재 가능이 곧 실존이다. 실존은 성찰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고유한 존재 방식이다. 실존철학의 중심문제는 인간의 현존재(Dasein)로부터 본래적 자기 존재로서 실존에의 복귀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존재의 일상성, 세속성, 퇴폐성을 깨닫고 주체성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실존주의는 주장한다. 헤겔 철학과의 대결을 통해 실존의 개념을 정리한 실존철학의 창시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주체성이 진리이고 주체성이 현실이다”고 했다.

  실존은 인간만의 고유한 존재 방식이다. 실체로서의 사물은 이미 확정된 성질의 존재인 반면 인간은 언제나 확정되지 않은 미 확정적 존재다. 하지만 실존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실존은 인간이 실현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수도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부단히 자기 자신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고양시키는 자기 극복, 끊임없이 자기를 강화시키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는 자기 초극, 그것이 실존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실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상
적·세속적·비 본래적 존재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기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
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근화여학교의 교훈인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는 자신의 존재 방식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창출하라’는 정언 명령이다.


 

<출처/조선일보> 조선일보 1926년 1월 21일 자에 소개된 근화여학교의 교훈이다. (박스 기사)교육의 참 의의가 “인격의 함양과 개성의 발휘”에 있다고 생각한 차미리사는 개성에 눈을 뜨는 여성이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근화여학교 학생들은 얌전하다는 평보다는 ‘활달하다’는 평을 받았다.



  자아를 잃은 곳에 무슨 참된 아내가 있으며 진실한 어머니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주체적 존재이므로 실존은 인간의 권리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조선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개인의 권리의식이 뒷받침된 주체적 사고보다 자기 몸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고 부모의 절대 권력을 용인하는 전통적 사고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체는 본인의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낡은 생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유학자들은 “몸은 내 소유가 아니고 바로 부모의 소유다. 남이 물건을 줘도 감격할 줄 알 것인데, 하물며 몸을 물려주신부모에게 있어서야?”고 하며, 오직 부모만이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원천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은 부모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고 또 존재할 수도 없으므로, 자식이 된 자의 몸은 부모의 소유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소유물인 자식에 대한 소유자인 부모의 권능도 도출됐다. 부모는 자식과 똑같은 인간존재이면서 동시에 절대자나 초월자처럼 차원을 달리하는 권한을 갖기 마련이었다. 자식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부모로서의 권위였다. 이것은 자식으로서는 자기부정의 논리이며, 사람으로서 상호 대등성, 즉 주체성을 거부하는 삶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념적 근거가 됐다.

  이처럼 자신을 부모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전통적 가치관을 극복하지 않는 한 주체적인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에는 억압과 속박이 더욱 심했다.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해서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야만 했다. 혼인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혼인은 개인과 개인 간 인격체의 만남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이 만나는 문중간의 결합이었다. 결혼 생활은 남성 중심적이었다. 여성의 한 평생 활동 범위는 집안으로 국한됐다. 자기 삶의 대부분을 가정과 남편,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숙명적으로 살아가는 조선 여성들에게 차미리사 선생은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을 것을 호소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아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단지 남의 종속물로서 노예의 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여자도 인간인 이상-자기도 이 사회를 구성한 한 분자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남의 기생자가 될 필요가 없을 것을 절실히 느껴야 하겠지요.(…)여러분은 결혼보다도 먼저 현명한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아를 잃은 곳에 무슨 참된 아내가 있으며 진실한 어머니가 있겠습니까?”
<출처/<조광> 1936년 3월호 중 ‘朝鮮女性이여 自立하라’>


  남편에 대한 사랑, 자식을 위한 희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현모양처를 이상적 여성상으로 가르치는 당시의 교육 풍조 하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여성해방은 스스로 자기 생활을 지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자신 스스로도 남의 힘을 빌리거나 의지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여자라는 한계를 뛰어 넘어 놀라운 실행력과 영웅적 희생정신으로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갔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 교육기관이 서양 선교사 아니면 남성유지에 의해 세워진 데 반해, 차미리사 선생이 3.1운동 정신을 계승해 세운 조선여자교육회는 조선 여성이 여성의 힘으로 여성을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학교를 경영·유지하는 방법도 강연회, 연극회, 바자회 등을 통한 자력갱생이었다. 그가 개신교 신자였지만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교육기관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사는 자립정신을 철저히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차미리사 선생은 인격적 자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물질적 자유를 통해 인격적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외치는 관념적 해방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해방, 평등한 삶을 사는 진정한 해방은 직업을 얻은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은 곧 인격을 되찾는 길이며 여성 해방의 지름길이었다.

  차미리사 선생은 학생들이 경제적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자양복과(1922.01), 여자사진과(1926.04) 등을 설치했는데, 이는 조선에서 최초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문적 실업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재단법인 근화실업학원 설립인가를 받았다(1934.02.08). 차미리사 선생의 실업교육 실시는 ‘여성해방은 여성이 직업을 가져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교육철학이 반영된 새롭고도 진취적인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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