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너머를 꿈꾸는 방법에 대한 단상(斷想)
근대 너머를 꿈꾸는 방법에 대한 단상(斷想)
  • 이명찬(국어국문) 교수
  • 승인 201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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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로 건너오며 세계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해야 할 만큼 외연이 확장됐다. 세계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정보의 폭주를 낳았고, 폭발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인지하고 설명할 방법들을 체계화했던 구분과 분류라는 오래된 설명 틀이 그 첫 자리에 놓였다. 그것은 ‘합리적 기준’에 따라 비슷한 성질을 갖는 것들을 묶어 분류하거나 하나의 그룹에 속한 종들의 차이를 나눠 구분하는 방식으로 대상들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도왔다.

  근대문명은 이들 가운데 구분의 힘을 빌려 스스로를 정렬해 온 측면이 강하다. 종교적이거나 관념적인 방법으로 우주를 이해하려던 전근대적 인식을 유보하고, 세부에 대해 정밀하게 이해하는 쪽으로 노력을 집중하면서 세계를 (초)미시적으로 쪼개고, 그 구성요소를 빈틈없이 분석함으로써 인류는 눈부신 문명을 이뤘다. 종합병원의 수많은 전공의의 종류가 ‘인간’을 쪼개 온 내력의 도달점이라면, 학문 분야를 극단적으로 세분화한 종합대학의 현실은 ‘세계’를 구분해온 역사의 종점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구분이 유효하려면 정의(定義)라는 방법의 도이 필수적이다. 설명하려는 대상의 한 종(種)을 그것이 속한 상위 범주인 유(類)에 묶으면서, 그 유에 속한 다른 종들과의 차이(종차(種差))를 밝혀 개념을 명확히 전달하려는 방법의 이름이 정의인바, 이는 ‘인간은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동물이다’와 같은 문장의 형식으로 성립한다. 이예에서 우리는 ‘정의’가 인간이라는 종을 그가 속한 동물 유(類) 속의 다른 종과 ‘구분’하기 위해서 작동하는 인지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종과의 차이를 밝히는 형식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차이에는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른 것들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정의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지라는 본래의 목표를 넘어 대상의 우열을 가리는 차별화의 논리로 둔갑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의 항의 예를 들어 이를 확인해 보자. 생각하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직립하는, 놀이하는 등의 종차들은 곧바로 그런 능력을 갖지 못한 동물류/생물류 다른 종의 열성(劣性)을 얕보는 논리의 배후로 작동한다. 합리적 기준으로 차이를 구분하고 정의하려던 저간의 노력들은 기실 이처럼 차별적 권력을 용인하는 논리적 거점이 돼 왔다. 그 결과 인류는 (무)생물에 대한 인간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동양에 대한 서양의, 갖지 못한 자에 대한 가진 자들의 우위를 공고히 하고 말았다.

  지난 세기의 말에 이르러서야 인류는 인지 방향 선회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융합, 통합, 통섭의 의미를 체계화하거나, 학문 분야의 재분류를 시도한다든지 학제 간 연구를 활성화 한다든지 하는 노력은 모두 종간에 내재하는 공통성을 찾아내 유개념을 추상하려는 묶음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학계에서의 이러한 노력은 사회의 다양한 부면과 연계해 근대가 확정해 온 고질적 차별 현장을 폭파하는 계기가 됐다.

  지구의 21세기는 내파(內波)의 연대로 기록될 듯하다. 인간, 서구, 남성, 민족중심주의라는 단일중심 체제의 균열 징후가 여러 방향에서 뚜렷하기 때문이다. 동물 복지, 반려 문화, 동양의 부상, 물류와 노동력의 국제적 뒤섞임, 다문화 사회, 갑질 혹은 재벌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 여성 운동의 다양한 발현에 더해진 한반도 분단 문제 해소의 움직임 그리고 미투 물결에 이르기까지. 이것들은 모두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용인되던 차별과 억압을 혁파하고 같은 사람·주체·지구인·사회인·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요청하고 있다.

  문제는 묶음의 목적에 대한 성실한 재확인이다. 사회적 종합의 움직임에 참여하는 주체들 스스로 지엽말단의 문제에 선정적으로 꺼둘리거나, 잘못된 권력의 징치에만 매달리거나, 피해 가해의 틀에 묶여 기초적 사실 판단을 회피하거나, 보편적 인권의 개념을 한 편에 유리하도록 적용함으로써 힘들게 시작된 통섭의 흐름을 끊지 않도록 주의를 다 해야 한다. 세상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차이가 없는 ‘더불어 사회’의 건설이 변화의 근본 목적이 아니던가. 대학인의 행동에서 이러한 지성적 밑받침이 제거된다면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 자체에 머물러 자위하는 인간이 되고 말 공산이 크다는 점에서 크게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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