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차미리사 선생이 사후 반세기 만에 독립유공자가 된 까닭은?
[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차미리사 선생이 사후 반세기 만에 독립유공자가 된 까닭은?
  • 한상권 덕성 100년사 편찬위원장
  • 승인 2018.06.1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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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반세기 만에 인정받은 민족독립을 위한 노력
  2002년 2월 22일 필자는 차미리사(1879∼1955)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 줄 것을 국가보훈처에 신청했다. 그동안
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서’에 차미리사 선생이 했던 독립운동의 주요 활동 사항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독립유공자와 유족과의 관계는 ‘없음’이라고 기재했다. 그해 8월 15일 광복 57주년을 맞아, 정부는 차미리사 선생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208명과 함께 포상하기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필자에게 통보했다. 차미리사 선생은 사후 47년 만에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공적을 인정받아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가 된 것이다. 국가보훈처가 밝힌 포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차미리사 여사는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1905∼1910년까지 한인교육기관인 대동교육회·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동’신문 발간에 기여하였고, 귀국하여 배화학교 사감으로 3.1운동을 겪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순회강연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을 역설하였고, 1923년 근화학원(槿花學院)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무궁화사랑운동을 전개했으며,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났다.
<출처/국가보훈처 ‘보도자료’, 2002년 8월 12일>



  
독립유공자 포상은 민주화 운동의 성과
  2002년에 차미리사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것은 민주화 운동의 성과였다. 덕성학원 민주화 운동은 1990년
에 있었던 해직 교수 복직 운동이 좌절된 이후 한동안 침체됐다가 1997년에 들어 무서운 힘으로 폭발했다. 필자가 해직된 1997년부터 박원국 이사장의 연임이 좌절된 2001년까지 5년동안 우리대학은 교육부 특별감사 2차(1997, 2001),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 4차례(1997, 1999, 2000, 2001)를 받았으며, 관선이사가 3차례(1997, 1999, 2001) 파견됐다. 또한 같은 기간동안 직무대행을 포함해 이사장 7명, 총장 5명이 교체됐다. 당시 덕성학원 이사장의 임기가 5년인 점을 감안할 때, 직무대행을 제외한 이사장 5명이 교체된 기간은 평화로운 시기의 25년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만큼 1997년부터 2001년 사이에 전개된 덕성학원 민주화 운동은 치열했다.



 

비상총회를 마친 후 가두에 진출하려다 우리대학 정문 앞에서 전투경찰과 대치하는 모습이다.(1997.10.1)


  덕성의 민주화 운동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권리투쟁이었다. 이사장의 무소불위의 절대화된 권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어느 사립대학보다도 낮은 급여와 열악한 근무조건, 끊임없이 발생하는 부당한 해직, 비싼 등록금에 비해 턱없이 낙후된 교육시설, 무분별한 학부제 시행 등의 암울한 교육환경에 맞서, 우리대학 교수와 학생, 교직원들은 빼앗긴 교육권·학습권·노동권을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비타협과 불복종의 정신으로 가열차게 민주화 운동을 벌인 결과, 덕성 구성원은 2001년 오마이뉴스가 뽑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됐다. 상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24시간 1인 릴레이 시위, 무기한 천막 농성과 단식, 그리고 집단 삭발…. 학생, 교수, 교직원이 따로 없었다. 여기에 졸업생들도 큰 힘을 보탰다. 2001년 덕성여대 민주화 투쟁에서 이들이 보여 준 모습은 분규를 겪고 있는 모든 사립학교에 하나의 모범이자 희망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올해의 인물’ 상패>


  강인한 단결력과 불굴의 투지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 까지 싸운 결과, 이해 10월 말 관선이사가 파견됐고, 이사장의 교수 부당 해임으로 시작됐던 학내분규는 정상화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 포상을 계기로 시작된 친일잔재 청산 작업
  덕성 구성원의 권리투쟁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기억 투쟁’으로 확장됐다. 기존 지배 체제에 대해 도전하는 권리투쟁이 성공하려면 지배 질서를 지탱하고 있는 가치 체계를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 ‘덕성여대 뿌리찾기 대토론회’를 계기로 ‘차미리사 초상화 봉정(2000.10)’과 ‘차미리사 연구논문 발표(2001.8)’, ‘차미리사 기일 추모행사 및 동상건립(2002.6)’ 등을 진행했다. 그리고 차미리사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자 교정에 연보석(年譜石)을 설치하고(2003.2), 개교기념일을 5월 17일에서 조선여자교육회 산하 부인야학강습소에서 여성야학을 시작한 4월 19일로 바꿨다(2004.1).

  설립자가 독립유공자로 포상됨으로써 덕성학원은 3.1운동 독립정신을 계승해 설립된 민족사학임이 공식 인정됐다. 덕성학원은 조선 여성의 손으로, 조선 여성의 해방을 위해 설립한 ‘순조선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이는 외국인 선교사나 남성 유
지에 의해 설립되거나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된 여타 학교와는 구별되는 덕성만이 갖고 있는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가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고 적시한 것처럼, 차미리사 선생은 외압에 의해 교장에서 쫓겨난 것이지 송금선을 후계자로 삼아 학교를 물려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밝혀졌다.

  그러나 덕성학원을 운영해온 박씨 일가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이 점을 애써 외면했다. 대학을 사회의 공기(公器)가 아니라 개인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낡고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덕성학원은 모자세습(송금선에서 박원국)에서 형제세습(박원국에서 박원택)으로, 형제세습에서 다시 부자세습(박원택에서 박상진)으로 이어지는 전형적 족벌 세습 재단이 됐다. 게다가 우리대학 설립자라고 일컬어지는 송금선(1905∼1987)은 친일파, 즉 반민족 행위자였다. 덕성학원은 단순한 족벌재단이 아니라 친일 족벌재단이었던 것이다.

  새천년 들어 덕성구성원들이 차미리사 선생을 복권하는 일에 매진한 까닭은 이러한 그릇된 현실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
다. 사립학교(이하 사학)의 공익적 전통을 되살리는 동시에 우리사회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친일잔재를 청산하려는 작업이었다.



  독립유공자 포상은 사학 전통의 회복
  우리나라 사학은 근대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국권 회복을 이념적 기반으로 해 출범했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애국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구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이들은 침탈당한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산업과 교육을 진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근일 국권 회복을 논하는 자로서 학문 교육을 말하지 않는 자들이 없다’라는 지적처럼, 당시 구국을 논하는 자들은 거의 모두가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사학에서 인재양성·실력양성·애국계몽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지만, 최고의 이념은 비운에 빠진 조국과 고통에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고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비리사학·부패사학이라는 용어가 상용화 되다시피 했다. 이는 많은 사학이 봉건적 혈연성·폐쇄성에
의거해 운영되면서 사유화·세습화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암담한 사학 현실에서 그것도 지난 수십 년간 분규사학의 대명
사처럼 불려왔던 ‘동토의 왕국’ 덕성여대에서 설립자를 복권하고 독립유공자로 포상까지 했다는 사실은 실추된 사학의 명예를 되찾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모은 돈으로 순조선적인 학교를 건립한 차미리사 선생에 대한 복권은 족벌세습과 친인척 비리, 만성적인 학내분규로 얼룩진 대학 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이정표가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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