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학술] 민심을 헤아릴 줄 알던 왕, 세종
[술술 풀리는 학술] 민심을 헤아릴 줄 알던 왕, 세종
  • 조남욱 부산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 승인 2016.03.1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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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드라마 <퐁당퐁당 러브(2015)>
  역대 조선시대 왕들 중 성군이었다고 평가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인 세종대왕. 드라마 <퐁당퐁당 러브>에는 백성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고 실제 농민들의 경험을 담아 농업 서적인 ‘농사직설’을 편찬하는 등 백성의 고충을 헤아리면서도 리더십을 발휘하는 세종대왕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처음부터 세자로 책봉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어떻게 왕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었을까. 또 그가 지금까지도 성군이라 불릴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백성들에게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리하여서 또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은 조삼모사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조판서 허조가 ‘백성들이 형법 조문을 상세히 알면 그 법을 농간하는 무리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던 대목에서 36세의 세종대왕이 그 반론으로서 이른 말이다. 이러한 발언은 세종 특유의 애민정신과 교화의식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나
  세종대왕의 성명은 이도(李祹, 1397∼1450)이고 왕자에 내리는 군호는 충령(忠寧)이고 묘호(廟號, 혼령을 모신 사당 이름)는 세종(世宗)이며 시호(諡號, 생시의 공덕을 기리어 올리는 이름)는 장헌(莊憲, 중국 명나라에서 받음)이다. 세종대왕 시기의 왕조실록 이름을 ‘세종장헌대왕실록’이라 하는데 이는 그의 묘호와 시호를 합해 표시한 것이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징조는 그의 나이 4살 때(1400년) 아버지 이방원이 형 이방간과 싸우던 시기에 어머니 민 씨의 꿈에서 나타났다. 즉 저 하늘에 태양이 있었는데 그 바퀴 가운데에 세종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태양은 이방원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곧 왕이 될 것이고 또 그 왕은 항상 세종을 안아줄 것이라고 풀이됐다. 그러나 세종에게는 두 형, 즉 세 살 위의 양녕대군(이름은 제褆)과 한 살 위의 효령대군(이름은 보補)이 있으므로 왕위를 이어갈 세자가 될 수는 없었다. 실제 1404년 8월에는 11세의 큰 형이 세자로 책봉됐고 장차 임금으로서의 정치능력을 키우기 위해 특별한 교육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세자는 오히려 광대들과 놀아나고 야외 수렵활동에 치중하며 남의 첩까지 취해 아이를 낳기도 하는 등 문란함을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태종은 수차례 주의조치를 내렸지만 역시 변화를 보이지 않자 마침내 세자 교체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자책봉 14년째 되던 해(1418) 6월에는 그 결심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누구를 새로운 세자로 삼을 것인가? 이에 대해 태종은 순서상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검토될 수 있다는 분위기를 의식하며 입장을 밝혔다. 즉 그는 부모가 말하면 미소로만 답하는 유약한 모습에다 불교 신자로서 술을 들지 못해 중국 사신과의 음주 의례에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등의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누구인가? 바로 셋째인 충녕대군 세종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필요했던 명분은 ‘왕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어진 자를 취한다’는 이른바 ‘택현(擇賢)’이었다. 일찍부터 세종의 총민함과 뛰어난 학덕을 유의해 보아온 대신들은 모두 그에 공감하던 터라 그를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자는 데에는 이의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왕비, 즉 세종의 어머니만은 ‘차후 왕자들 사이의 불화가 발생할 수 있음’을 염려해 반대했다. 이에 앞서 태종은 왕권을 넘본다는 불충의 죄목으로 왕비의 네 남동생들을 죽이기도 했다. 또한 태종은 세자 교체 사안에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읽힌 최측근 비서관 황희마저도 외지로 밀쳐 놓았었다.
세종은 농민들을 위해 농민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만든 농업 서적인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성군으로서 세종의 면모
  1418년 6월 태종의 결단으로 갑자기 세자에 오른 세종은 그 두 달이 지날 무렵 태종이 병권(兵權)만 유지한 채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에 이른다. 이로 인해 세종은 22세로 조선왕조 제4대 군주가 됐다. 그 후 32년 동안 훈민정음 창제부터 과학적 측정기구 개발 및 예악의 정비 등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업적을 남기며 어진 정치를 펼치고 별세하자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의 요순(堯舜)’으로 칭송했다. 그 이후에도 부단히 성군(聖君)으로 추존되고 있으니 오늘날 지폐를 통해 그를 기리고, 여러 기관이나 지역에 ‘세종’ 이름 붙이기를 서슴지 않으며 또 스승의 날(5월 15일) 설정을 그의 탄생일로 잡고 있다.

  그러면 그렇게 어진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저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첫째는 도덕성 중시의 태도이다. 그는 효성과 공경의 마음으로 모친의 걱정을 떨쳐내듯 왕실의 화목을 꾀했으며 도덕국가 건설을 위해 거국적 표창사업과 교화활동을 적극 펼쳐갔다. 둘째는 지식 정보 확장의 태도이다. 세종은 왕자 시절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는데 곧 경연과 집현전을 활성화해 『대학연의』를 비롯한 여러 고전강독으로 방대한 지식 정보를 확보하면서 각종의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셋째는 인재 발탁 등용의 뛰어남이다. 황희를 다시 부른 부왕의 뜻을 따르고 인사행정에 탁월한 허조를 이조판서에 앉히는 등의 일로부터 음악의 박연, 과학기술의 장영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전문성을 집약시키던 능력이다. 넷째는 민의를 중시함이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확인되듯 세종은 백성들의 불편함을 찾아 적극 해소해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소출 향상을 위한 『농사직설』의 편찬이나 세법 조정을 위해 농민까지 참여시킨 최초의 여론조사 등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타난 것들이다. 그리고 공개적인 정책수립에 있어서는 토론을 활성화하며 반대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던 리더십 또한 그를 성군으로 칭송하게 하던 요인이었다.

  세종의 지닌 인간미
  세종은 군주이면서도 인간 사랑의 마음이 매우 깊고 그 폭이 넓었다. 그리하여 세자 교체 시기에 발생한 왕실 불화의 우려를 철저히 불식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받는 임금으로 각인될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님 치병을 위해 그를 모시고 잠적하기도 해 상왕으로부터 정무복귀를 하달 받는가 하면 사별한 부모님의 혼령 위로를 위해 유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불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또 상왕에 의한 장인의 제거로 상심했던 부인 심 씨를 향해서는 항상 공경의 예를 다하다가 그와 사별한 이후로는 그 애정의 흐름으로 불교에 심취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부왕 때에 굳힌 후궁 9명의 전통을 따라 세종에게도 많은 여인이 있었으나 그 왕비와의 사랑은 그렇게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세종의 인간사랑은 노인들을 향해서도 나타났다. 즉 그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모두 궁중에 초청해 정성껏 경로잔치를 거행하면서 부인들은 그 다음날 왕비의 주관으로, 또 지방 노인들은 각 수령들이 자신의 예를 따라 시행하도록 했으니 전국의 모든 노인들에게 존경심을 보이며 인생 장수의 미풍을 조성한 셈이다.

  또한 세종이 왕자 시절 성균관으로부터 추천받은 이수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던 인연을 높이 여기며 재위 기간에도 자신의 정치행정을 돕도록 하던 모습에서도 의리 중시의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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