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 멈춰도 괜찮아, 청년 번아웃
달리다 멈춰도 괜찮아, 청년 번아웃
  • 정예은 기자
  • 승인 2018.11.26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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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

  학창시절에는 시험을 잘 봐야 했다. 키가 다 자라지 않았는데도 학원에 다니고 학습지를 풀며 학교에서도 공부해야 했다. 그때는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가면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취업 준비를 해야 했다. 취업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격증을 따고 토익에 응시하고 대외활동에 참여하는 등 스펙을 쌓았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기업에 지원 서류를 넣었지만 모두 어김없이 탈락 문자를 받았다.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인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는 없었다. 비참한 마음에 바람을 쐬러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때 또다시 탈락 문자를 받았다. 나는 떨어졌다.

  점차 지쳐가는 청년들
  지난 9월 19일, 통계청이 보도한 ‘2017년 사망원인통계’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평균 자살률은 10만 명당 24.3명에 달했다. 이는 OECD 평균 자살률의 두 배에 달한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상위권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청년층의 높은 자살률이다. 전체 사망자 중 10대는 30.9%, 20대는 44.8%, 30대는 36.9%가 자살로 인해 사망한다. 10~30대의 사망 원인 중 1위가 자살이며, 20대는 사망자 중 절반 가량이 자살로 인해 사망했을 정도로 청년층에서의 자살 문제가 두드러진다.

  이 같은 청년층의 자살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며, 청년층이 자살하는 원인으로는 주로 심각한 청년 취업난, 경제적 어려움 등이 지목된다. 청년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지만 어느 순간 탈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과도한 일정을 소화하던 사람이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무기력에 빠져 탈진한 상태를 ‘번아웃’(Burnout)이라고 한다.

  동아일보의 <희망 잃어버린 20대, 가장 지친 ‘탈진 세대’> 기사(이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4월 2일, 동아일보가 10대 이상인 1,000명을 대상으로 번아웃 지수를 조사(이하 번아웃 지수조사)한 결과 20대가 46.5점을 기록해 모든 연령대 중에서 가장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에서 10대는 45.9점, 30대는 43.7점, 40대는 42.8점, 만 50세 이상은 39.2점을 기록해 20대를 제외하면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번아웃 지수가 낮아졌다. 학업과 취업난 등에 시달리는 20대에게서 번아웃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라진 계급? 정신적 계급사회
  그렇다면 무엇이 청년들을 번아웃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이는 청년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기인한다. 지금 사회는 계급이 사라진 사회지만, 정신적 계급은 여전히 존재한다.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박한선 연구원(이하 박 연구원)은 “농업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가 중층화되며 계급이 발생했다”며 “이는 인간의 정신세계에도 영향을 줘 계급에 대한 인식을 내재화했다”고 말했다. 이어 “신분제가 사라진 국가에서도 여전히 사람의 출신이나 가문, 지역, 학력, 사회적 신분 등에 따라 위계가 나뉜다”며 “겉으로는 모두 평등하다고 하지만, 모든 것에 서열을 나누는 인간의 심리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직업위세를 보면 우리나라는 직업 간의 서열이 공고한 편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장홍근 박사의 <직업위세에 대한 인식의 국제비교>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 독일을 대상으로 각국의 취업자들이 가진 직업의식을 5점 만점으로 조사한 결과 미국의 직업위세는 2.72~3.82점, 일본은 1.77~3.88점, 독일은 1.61~3.77점, 우리나라는 1.56~4.21점을 기록해 직업위세의 격차가 가장 컸다. 직업위세란 사회의 구성원이 어떤 직업에 대해서 평가하는 해당 직업의 권위나 중요성, 가치 등의 정도를 의미하는데, 직업위세의 격차가 클수록 직업의 귀천의식이 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직업의 ‘신분 차이’가 크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경쟁 역시 일상화됐다.

  박 연구원은 “제도로 남아 있던 *반상의 구분은 사라졌다”며 “하지만 기존의 ‘높은 신분’은 의사나 판사, 고위 정부 관료, 기업 임원 등이 대체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는 누구나 노력한다면 이론적으로는 높은 신분을 얻을 수 있다”며 “하지만 이로 인해 사람들 간의 경쟁이 과도해져 실질적으로는 신분제가 더 공고해졌다”고 말했다.

 

한국인 얼마나 번아웃 됐나(위), 번아웃이 됐을 때 어떻게 하는가?(아래)<출처/동아일보>

  사라진 계층 상승의 사다리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사회는 ‘개천에서 난 용들’의 성공 신화로 채워졌다. 우리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성공은 개인의 노력이라는 요소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성공은 개인의 노력에 더해 지능과 재능,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때로는 국적, 인종, 성별 같은 부가적 요소들의 조합으로 이뤄진다.

  그중에서도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자녀의 계층을 형성하는 데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김종성, 이병훈 연구자의 <부모의 사회계층이 자녀의 노동시장 성과에 미치는 효과> 논문에 따르면, 부모의 사회계층에 따른 자녀의 노동시장 성과를 직업지위점수와 월평균 근로소득으로 비교한 결과 전문관리직 및 고용주 자녀의 직업지위 평균 점수가 자영업자, 숙련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의 자녀보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녀의 직업위세에 대해서는 부모의 계층지위가, 자녀의 소득에 대해서는 부모의 소득이 결정적 역할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자녀의 직업지위와 소득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금수저’가 아닌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불리하게 시작한다는 것이다.


  청년에게 강요되는 ‘노오력’
  청년들은 정해진 신분이 없으니 개인의 노력에 따른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회적 규격’에 맞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헬조선’, ‘N포세대’ 등의 신조어가 보여주듯 청년들은 충분히 여유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여러 악조건에 처해 있다. 하지만 청년들은 젊다는 이유만으로 최선을 다해 ‘노오력’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는 성공이 순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사고에서 비롯된다. 이와 관련해 박 연구원은 “우리사회는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없는 사회다”며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신분이 아닌 계층 장벽이 없는 것으로 오해해 누구든 노력하면 높은 신분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의 번아웃은 그들이 우울증을 느껴도 이를 쉽게 토로하지 않아 더욱 문제가 된다. 사회초년생인 20대가 정서적 어려움을 호소해도 주변에서는 이를 ‘나약하다’고 인식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고강섭 교수는 파이낸셜 뉴스에서 “20대가 우울증과 정서적 어려움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집단문화 때문이다”고 전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가정, 회사에서 개인보다 집단의 화목과 발전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개인의 감정은 소외된다”며 “집단문화에 깔린 것은 경쟁으로, 경쟁 속에서 내가 우울하고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경쟁 구도에서 뒤처지게 된다”고 전했다.

  이처럼 번아웃을 겪고 있는 청년들은 번아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번아웃 지수 조사에서 번아웃 해결 방법으로 ‘음주, 수면, 폭식 등 본능적 욕구 해결’이 26%로 1위를 기록했다. ‘전문가, 기관 등의 상담’은 1.5%에 그쳤다. 이에 대해 국립정신건강센터 최성구 의료부장은 동아일보 기사에서 “일부 청년은 폭식과 폭주, **탕진잼 등 눈앞에 보이는 쾌락에 열중한다”며 “이는 일종의 우울증 증상에 해당한다”고 전했다. 번아웃을 겪고 있는 20대가 번아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도한 경쟁에 지쳐 자포자기하는 모습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박 연구원은 “자신의 삶을 투자할 건강한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목적이 아니라 삶 자체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과업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푹 빠지는 삶에 높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가는 것이 맞다”며 “건강한 목표를 위한 노력이 ‘노오력’이 아니라 진짜 좋은 노력이다”고 말했다.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제도와 경쟁적 문화의 산물이다. 우리사회에 만연한 번아웃을 줄이기 위해서는 교육 제도와 경쟁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등의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사회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한 경쟁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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