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에서 엘리트 혹은 권력으로
전위에서 엘리트 혹은 권력으로
  • 김문규 영어영문학과 교수
  • 승인 2019.12.01 0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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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분야든 정치 분야든 전위는 변동이 심한 문화적, 정치적 발전 조건에서 출현하기 쉽다. 반드시 우월한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사회 환경 때문에 일군의 사람들이 아직 명백하지 않은 특정한 현실을 미리 포착함으로써 전위로 떠오른다. 그 과정에서 대체로 그들은 각종 문화적, 정치적 억압의 대상이자 그 억압에 맞서는 투사라고 하는 고유의 경험으로 인해 전위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방적 잠재력을 지니게 된 그들의 본질적 속성은 거듭나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 파괴다.

  하지만 그렇게 출현한 전위들 대부분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선이나 정의 등의 가치를 선점한 이후에는 끊임없는 자기 파괴를 중지하고 자기 영속성을 추구하는 엘리트로 변한다. 그 변신 과정에서 그들이 지녔던 해방적 잠재력은 소진하고 만다. 나아가 그들은 억압과 퇴행의 속성에 맞섰던 권력이 돼 그들이 대변했던 선과 정의 따위를 시대착오적 가치로 화석화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종국에 새로운 전위가 출현할 수 있는 토양에 다름 아니게 된다.

  우리는 최근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한 지식인이자 정치인에게서, 그리고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떠받들리던 한 문화 권력자에게서 전위로부터 권력으로의 이행이 맞이하는 씁쓸한 결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전위로 등장했다가 끝내 화석화된 권력이 자멸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게 인간사인데 별수 없지 않느냐는 패배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져들기 쉽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기를 거부하는 화석화된 권력이 자멸할 때까지 그저 지켜보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낡은 것의 이러한 지속, 교착이야말로 새로운 것이 등장하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자리다. 즉, 전위는 우리의 패배주의나 냉소주의가 화석화된 권력과 공모해 조성한 자리 어디에선가 이미 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패배주의나 냉소주의가 그렇게 출현하는 전위를 또 다시 권력으로 퇴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반복하는 악순환에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 일은 이런 깨달음에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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