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혁명가 고대수
최초의 여성 혁명가 고대수
  • 덕성여대 기자
  • 승인 2005.10.08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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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숨은 여성을 찾아서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우리의 머리 속에 거의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여성들의 활동이 시대적으로 억압되었던 그 시절에, 궁녀의 신분으로 사내대장부들의 틈에 끼어 혁명의 꿈을 꾼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이 바로 고대수이다. 고대수는 7척이나 되는 키, 지금으로 따지면 2미터 10센티가 되는 키에 웬만한 남자 대여섯 명은 거뜬히 들어올리는 거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명인 이우석 대신「수호지」에 나오는 여장부의 이름을 따서 고대수라 불렀다. 이런 남다른 신체조건 탓에 고대수는 서른일곱이란 늦은 나이로 무수리로 입궁하게 되어 민비를 보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당시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심했던지라 외모에서 풍기는 강한 인상으로 고대수는 남자들에게 외면받기 일쑤였다. 그렇게 외로이 지내던 고대수에게 어떤 청년 하나가 새 정권을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다. 바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의 김옥균 이였던 것이다. 김옥균은 고종의 동정을 알기위해 고종의 측근 궁녀가 필요했고 그의 동조자로서 고대수가 제격이였다. 고대수는 계급을 타파하며 민권을 신장하도록 하고 국정을 쇄신하겠다는 개화당의 뚜렷한 명분을 듣고 기꺼이 이 혁명에 가담하게 되었다. 듬직하게 민비를 보살폈던 고대수는 민비의 신임을 얻기 충분하였고 항상 민비 곁에서 궁내의 기밀과 보수파의 움직임을 살펴 수시로 개화당인사들에게 정보를 알리곤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 왔다. 우정국 개설을 축하하기 위한 그날 별궁에 불을 지르는 신호로 행동을 개시하는 고대수의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고대수는 대나무 대롱에 넣은 폭발약을 밖에서 불이 나는 신호를 보고 터뜨렸다. 통명전에서 터져 나오는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자 고종과 민비는 두려움에 떨며 황급히 창덕궁을 떠나게 됐다. 이렇게 하여 김옥균은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으로 옮기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머무는 동안 각종 혁명 공약을 공포했다. 그러나 곧 고종과 민비가 창덕궁으로 돌아와 혁명이 삼일천하로 끝이 났지만 유교 사상이 짙었던 그 시절에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꺼려했기에 여자가 그것도 궁녀의 신분으로 혁명을 계획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혁명의 실패로 인해 개화당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며, 미처 피신하지 못했던 인사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중에 고대수도 포함 돼있었다. 다른 죄수들과 함께 공개처형을 당하게 된 고대수는 여자라는 신분으로 양반집 자제들과 혁명운동에 가담한 것에 대해 더욱더 사람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샀고 돌팔매질로 처참히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내린 혁명을 위한 결단과 그녀의 용기도 함께 민중들에게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실패로 접어야만 했던 고대수의 꿈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보여준 여성으로서의 대담한 용기는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사회의 여성이 입지를 굳히는데 있어 한줄기 빛으로 남아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효성 기자 / lhs0078@duk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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